6년 만에 다시 돌아온 볼리비아
현대인은 시계와 계획표, 그리고 에어컨과 배달 앱이 제공하는 완벽하게 관리된 안락함 속에 산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더 안전하고 더 효율적인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계획한다. 그러나 그 계획의 부산물이 바로 불안이다. 오늘날의 뇌는 주식시장, 커리어, 연금, 혹은 내일의 날씨 같은 무수한 미래의 경우의 수를 끊임없이 계산한다. 그 계산은 안전망을 키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목표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를 염려하는 불안을 키운다.
이 지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책이 바로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교수, 탐험가가 쓴 『편안함의 습격(Comfort Crisis)』이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는데, 솔직히 큰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저자가 알래스카 북극에서 33일간 순록을 사냥하며 생존한 경험은 유독 특별하다. 그곳에는 정답이 없다. 길도, 숙소도, 메뉴도 없다. 눈보라와 맹수, 추위와 굶주림만이 있을 뿐이다. 그 안에서 그는 깨닫는다. 삶이란 본래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속에서 순간의 판단을 통해 버티는 행위였다는 것. 효율성과 생산성에 기반한 완벽한 계산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지금을 견디는 행위만이 가능하다는 것. 사냥을 하던 인간의 뇌는 본래 덤불 속에서 맹수의 소리를 듣고 “지금”을 판단하도록 진화했다는 것.
내가 볼리비아의 현지인들을 따라다니며 했던 경험들도 어쩌면 이와 같은 맥락에 있었을지 모른다. 한 번은 라파스에서 오루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중간쯤, 인적이 드문 안데스의 들판에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돌을 달궈 양고기를 구워 먹었다. 도심의 마트에서 고기를 사서 30분 만에 조리할 수도 있었지만, 현지인들이 굳이 우리를 들판으로 데려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돌을 불에 달구고, 다시 두 시간 동안 고기를 돌 속에 묻어 기다린 뒤, 또 두 시간 동안 고기를 먹었다. 여섯 시간에 걸친 식사였다.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와 같이 고기를 허겁지겁 뜯어 먹었다. 장작을 패고, 돌을 나르고, 장작불을 관리하느라 몸이 지쳤다. 그 덕분인지 그간의 걱정들은 말끔히 잊혔다. 안데스 산맥의 광활한 풍경 속에서는 오직 불꽃과 연기, 고기 냄새와 바람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마운틴 바이크로 데스로드를 내려오던 순간도 비슷했다. 데스로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고속도로로, 과거에는 해마다 200명이 목숨을 잃던 곳이다. 융가스 지역 웅장한 산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흙길이 1500미터 절벽 옆에 놓여 있다. 4시간, 30km를 달리는 자전거 기행. 마운틴바이크의 속도는 쉽게 제어되지 않고, 방향 감각은 심하게 뒤틀렸다. 나는 그저 흔들리는 자전거의 브레이크와 핸들만 붙잡고 있었다. 손과 전완근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뇌는 계산을 멈췄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 무리가 가지 않도록 호흡을 조절해야 했을 뿐이다. 일상 속의 고민인 커리어도, 인간관계도, 미래의 불확실성도 말끔히 사라졌다. 오직 절벽에 떨어질까 두려운 지금, 눈앞의 바퀴와 발아래의 흙먼지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몰입의 끝에, 생각이 정화됨을 느꼈다.
우리는 흔히 불안이 외부에서 주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불안은 대부분 뇌의 내부 작용에서 비롯된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미래에 대한 상상적 시뮬레이션(anticipatory simulations)이 반복될수록 불안은 유지되거나 증폭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수십 가지 경우의 수로 분석하고, 대비하고, 실패를 예측하는 과정에서 불안이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적 관념—부, 커리어, 인간관계—가 더해진다. 우리는 일정 수준의 부를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원하는 커리어에 오르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면 어떻게 할지 끊임없이 걱정한다. 그리고 그 불안을 줄이기 위해 또다시 수십 가지 계획을 세운다.
극한의 자연 환경은 이 연산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여기의 감각만이 살아남는다. 그 순간 불안은 사라지고 단순한 평온이 자리를 대신한다.
물론 이런 경험은 극지방 탐험가나 모험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종종 국제 조사에서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행복도가 높게 나타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농경지에서는 사람들은 여전히 물을 긷거나 장작을 구하거나 경작지에 가기 위해 하루 다섯 시간을 길에서 보낸다. 남미의 고산 지역에서도 원주민의 생활 양식은 여전히 이어진다. 그들과 교류하다 보면 우리가 가진 시간과 계획의 관념이 다름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의 삶은 미래의 축적보다 현재의 행위에 집중된다. 저축을 미루고 축제를 즐기며, 장기적인 계획 대신 그날 닥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효율의 논리로 보면 체계적이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즉시성 속에는 불안을 줄이는 삶의 리듬이 있다. 그래서 이런 국가들에선, 자주 쓰는 격언도 "하쿠나마타타(Hakunamatata 문제 없어)" "폴레폴레(Pole Pole 천천히)" "트란킬라(Tranquila 평화롭게)" 등이 많다. "빨리빨리"가 격언인 한국과는 상반된 분위기다.
요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고속 열차처럼 정해진 경로 위를 질주하는 삶, 사회가 요구하는 과제를 끝내기 위해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본다. 그들의 불안을 들으며, 때로는 ‘미래’라는 시간의 환영에서 벗어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원초적인 지금-여기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우울감에서 벗어나는 길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시간의 관념에 쫓길 수 없다. 어쩌면 알래스카에서 맹수에게 쫓기는 순간이, 역설적으로 가장 깊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경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