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 인터뷰에서 친구가 바라본 자신
차쌤은 15년 간의 국제기구 생활 이후 한 템포 쉬어가고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애인과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는 숨막히도록 치열했다. 케냐에서 유년시절을, 스웨덴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 시절에는 휴학을 하고 잠시 일본에 머물기도 했다. 드문드문 한국에도 있었지만 이내 탄자니아를 시작으로 케냐, 수단, 그리스, 예맨,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나라를 횡단했다. 쉬어가면서 그가 느끼는 자신의 삶에 대한 소회는 어떨까. 유년시절부터 물었다.
지금 부다페스트는 몇 시예요? 쌤 뒤로 창밖 햇살이 들어오네요. 완연한 오후 같아요.
네, 여기는 오후 3시예요. 잠깐 일이 있어서 원래 살던 곳에서 나와 조용한 동네에 에어비앤비를 구했어요. 평소 살던 곳과는 분위기가 달라요. 넉넉하진 않지만 따뜻한 느낌이 있어요. 근처에 자원봉사 단체도 있어서 방금 잘 입지 않던 옷들을 모아 기부하고 왔어요. 사람의 온기가 스며 있는 동네라 마음이 놓여요. 제 마음의 고향인 한국의 쌍문동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그래서인지 더 반갑고 좋아요.
전 세계를 돌아다녀도 거처는 어렸을 적부터 계속 쌍문동에 두고 계시잖아요.
그렇죠. 5살 때 케냐로 나가기 직전에 외할머니가 쌍문동에 계셔서 함께 살게 됐거든요. 옛날에는 유치원이 아니라 ‘유아원’이라고 불렀거든요. 쌍문동에서 유아원을 다녔어요. 제일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다 쌍문동이에요. 저는 3-4살 때 기억도 잘 나는데, 부모님은 늘 그걸 신기해하셨어요. 케냐에 있을 때는 마치 뿌리째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럴수록 한국에 갖고 있었던 기억의 편린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꽉 잡고 있었어요. 그 조각들이 아직도 저는 되게 생생하게 기억나요.
어떤 장면들이 가장 또렷해요?
가장 기억나는 건 진 올리브색 냉장고, 버터에 비벼 먹던 밥, 빨간 플라스틱 밥 공기. 또 매일 생일이 빨리 오길 바라서 어머니한테 “나 오늘 네 살이야?” 하고 물어보던 거요. 방금 세 살 생일을 했는데도 그게 너무 좋아서, 다음 날 또 어머니에게 달려가 “오늘은 네 살이지?” 하고 묻곤 했어요. 어머니 손을 잡고 장을 보러 지하상가에 내려가던 기억도 나요. 어린 나이에 갑자기 낯선 곳으로 옮겨가면서, 한국에서의 기억들을 놓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붙잡았던 순간들이 있어요.
케냐에 갔을 때는 왜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프리카라는 곳을 간다는 건 어린아이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그때 제게 아프리카는 ‘타잔’이나 ‘사자’ 같은 이미지였거든요. 어린 마음에 ‘동물한테 잡아먹히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떠올릴 때 동물이나 사파리 같은 모습만 보여주잖아요. 도시의 삶은 잘 안 비추니까요.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아, 그게 아니구나’하고 깨달은 기억이 남아 있어요.
80년대 말이었는데, 당시에는 한국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많이 가지 않을 때였어요. 게다가 전화비가 너무 비싸서 전화도 못 하고, 인터넷, 이메일도 없었으니까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더 강했죠. 어린 저한테는 상당히 큰 두려움이었겠죠.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도 떨어져야 했고, 전에 다니던 피아노 학원도 그만둬야 했으니까요. 한국에서의 일상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게 제 의식 깊은 곳에 정신적인 충격으로 남았던 것 같아요.
케냐에 몇 살까지 사셨어요?
유치원 끝내고 국민학교 4학년 초에 돌아왔으니까, 4년 정도 살았네요. 저는 아직 아주 어린아이였잖아요. 그래서 국적이라든지, 적응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어요. 학교가 현지화가 잘 돼 있어서, 아침마다 케냐 국가(國歌)를 스와힐리어로 불렀거든요. 그 멜로디가 아직도 기억나요. 저는 그때 제가 ‘케냐 사람’인 줄 알았고, 당시 케냐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이라고 믿었어요. 그냥 몰랐던 거죠. 누가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애국심 같은 게 아니라, 단순히 아기니까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자꾸 저를 보고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묻곤 했어요. 쌤도 탄자니아 계셨으니까 아셨을 것 같아요.
네, 길거리를 걸어가면 사람들이 5분에 한 번씩 ‘치나(중국인)?’냐고 물어보죠.
맞아요. 그때만 해도 아프리카에 동양인이 정말 드물었어요. 그나마 영국계 백인들과 인도인들이 상류, 중산층으로 있었고, 흑인 대다수와 또 다른 사회적 구분들이 있었고요. 그런데 저는 일본인처럼 인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중국인처럼 큰 나라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더 낯설게 여겨졌던 것 같아요.
쌤은 어렸을 적부터 해외 생활을 정말 오래하셨잖아요.
그렇죠. 한국에 다시 들어왔다가, 중학교 2학년 시작하자마자 스웨덴으로 갔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한국에서 입시를 치르고 대학을 다니다가 또 일본에 살짝 가서 살았고요.
어떻게 보면 주변인으로 계속 사신 거네요, 아까 ‘치나’라는 말도 들었다고 하셨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제 이메일도 ‘life on the margins’잖아요. 말 그대로 변두리의 삶이에요.
그때의 변두리 삶이 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저는 계속 ‘마이너(minor)’로 살아왔던 것 같아요. 해외에서도 마이너였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이너라고 느꼈고요. 그렇지만 이러나 저러나 주어진 몫에 충실하면서 잘 살아온 것 같아요. 굳이 ‘메이저(major)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는 한국 사람이고, 케냐에서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죠. 스웨덴에서는 한국인 입양아가 많았고,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어요. 지금처럼 한국인이라고 환영을 받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걸 제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그냥 나름대로 적응하며 살았어요.
다만 좋았던 점은, 한 번도 영어 때문에 인생에서 손해봤다고 느낀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건 정말 큰 힘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강하게 제 주장을 펼칠 수 있었거든요. 제가 ‘메이저’가 아닐지언정,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넘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저도 해외에서 살면서 변두리의 삶을 경험해봤어요. 그런데 이야기를 주도하거나 자기 주장을 하는 일은 항상 어렵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쌤은 자기 의견을 내는 데 거침이 없으시잖아요. 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 같은 모습이었나요?
저는 이야기를 ‘주도한다’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대화에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항상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언변이든, 언어적 장벽이든, 그런 이유로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자리를 만드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코디네이션이요.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려고 제가 광대 역할을 맡기도 하죠.
그런데 또 싸워야 할 때가 있잖아요. 집주인이 이상한 얘기를 한다든가, 회사에서 나의 실적이 잘못알려진다든지. 그런 상황에서는 강하게 주장해야 해요. 그럴 땐 저도 싸웠죠. 특히 해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한인분들 대화를 보면 언어가 서툴러서 불편을 겪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지금이야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친구들이 많지만요, 저는 사람들이 제가 말을 제대로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제 의견을 함부로 무시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또 쉽게 지는 스타일도 아니거든요. 이게 제 힘이에요. 이런 부분은 저를 어렸을 때부터 해외로 데리고 다니신 부모님께 늘 감사한 이유기도 하고요.
쌤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어땠나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을 텐데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에 들어와서 특례 입시 학원을 1년 반 동안 다녔어요.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는 한국 고등학교를 다니고, 그다음 오후 5시부터 밤 10시 반까지는 특례 학원을 다닌 거죠. 그때는 그냥 ‘나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했어요. 남들이 다 가는 대학교를 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정말 큰 문화 충격을 받았어요. 해외에 있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느낀 건지, 아니면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넘어가면서 느낀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어떤 문화 충격을 느꼈어요?
우리나라 문화 중에서 가장 특이했던 게, 그 당시에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꼭 노래를 시킨다는 거였어요. 저는 한국 노래를 하나도 몰랐거든요. 되게 당황했어요. 결국 노래 가사를 열심히 외워서 모임에 가곤 했죠. 부르다가 까먹은 적이 대부분이지만…
또 술을 엄청 많이 권하더라고요. 밤 10시 반에 갑자기 찌개를 시켜서 밥을 먹는 것도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됐어요. 술을 마시다가 사람들이 웃거나 울기도 해요. 가끔씩은 사람들의 대화에 깊숙하게 들어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가 많았어요. 이 사람들의 감정을 내가 잘 모르겠는 거예요. 사람들이 우는데 왜 우는지 모르겠고, 또 막 웃는데 그게 왜 웃기지? 싶고.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위계질서와 미소지니. 제가 연극반을 했는데, 무대감독, 연출과 기획은 반드시 남자가 해야 한다는 식이었죠. 선배들이 와서는 “회장이 여자야?”라고 묻고, 여성 비하 농담이 당연하게 오가던 시대였어요. 저는 그때 스웨덴에서 막 돌아왔던 터라, 어이가 없었죠.
말씀하신 대로 스웨덴은 성평등에서 상대적으로 앞서 있잖아요. 그런데 또 해외에 사는 분들 중엔 한국에 있는 한국인보다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는 경우도 봤어요. 케냐는 분위기가 또 다르셨을 것 같아요. 여러 나라를 경험하셨는데 지금 가치관의 준거는 어디로부터 비롯됐어요?
사실 무엇보다도 저희 집안이 워낙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감이 가장 크게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쌤이 살아온 경로만 보면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신 것처럼 보여요.
아니에요. 사실은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많은 부분을 제 스스로 선택하고 싸워서 지켜낸 거예요. 예를 들면 제가 26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저를 꼭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어요. “서른이 되면 결혼하기 어렵다” 하시면서 회사 후배를 소개해 주려고 하셨어요. 그 사람이 결혼하면 아쉬워하시곤 했죠. 또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여자 아이가 태어났으니까. 어렸을 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속으로는 상처가 됐지만, ‘이 상황에서 나를 지켜줄 사람은 결국 나 자신밖에 없구나’ 하는 걸 일찍 깨달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스스로 힘을 길러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러면은 인생에서의 결정을 내릴 때마다 가족들에게 설명해야 했던 부분들이 있었겠네요.
설명보다는 통보에 가까워요. 제가 처음 국제기구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는 당연히 제가 뉴욕에 간다고 생각하셨어요. 제가 “수단에 갑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때 아버지 첫 마디가 “너는 부모가 없니?”였어요. 수단이 뭐 어때서요! 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인데 말이에요.
저는 부모님을 설득할 방법이, 솔직히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돈’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스스로 당당히 서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두 분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던 거죠.
국제기구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집안에서 저에 대한 기대는 거의 없었어요. 대학 시절에는 연극을 하며 지내면서 취직과는 계속 동떨어진 삶을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자꾸만 ‘공무원 시험을 봐라’, ‘한국에 있는 회사에 취업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개발학을 하고 싶은 거예요. 방법은 단 하나였어요. 제가 제 힘으로 학비를 벌어 직접 가는 거였죠. 당시 영국 대학원 학비가 우리 돈으로 3000만 원이었는데, 대학교 시절에 영어 과외를 열심히 해서 2500만 원을 모았어요. 아버지가 “시집 안 가냐?” 하셔서 “학비 모았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그러면 학비는 우리가 내줄 테니 그 돈으로 생활비 해라”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대학원에 갈 수 있었죠.
그런데 웃긴 건, 영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 가는 차 안에서도 아버지는 “한국 남자들은 여자 월급이 자기보다 높거나 영어를 잘하면 불편해한다. 거기 가서 영국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한국 남자랑 결혼해라”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유학 가서도 결국 시집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었죠. 그게 2008년 일이에요. 그렇게 저는 집을 나왔습니다.
돌아와서는 NGO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처음 탄자니아에 갔을 때 서울시 인턴으로 세금 떼고 월급이 137만 원이었죠. 집에서 실망이 많았어요. 그러다 정부 부처에 연구원으로 들어가니 집에서 좋아하셨어요. 공무원은 못 됐지만 어쨌든 비슷한 일을 하는 거니까요. 이후 제가 국제기구에 정식으로 합격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마치 9회 말 2아웃에 홈런을 친 것처럼요. 달러로 월급을 받아오니, 부모님은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셔도 월급 액수만 보고 “이 정도면 시집은 늦게 가도 괜찮아”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점이 있어요. 저희집도 조금 비슷하거든요. 제가 사회적 정도를 따르기를 기대하세요. 이런 집안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진성의 가치를 좇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맞아요. 집안의 가부장적 분위기에 늘 발목이 잡혀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더더욱 대학원에 가야지, 탄자니아도 가야지 하면서 밀고 나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씨름하듯 살았습니다.
동시에 부모님이 저에게 영감을 주신 것도 사실이에요. 저를 해외로 이끌어주신 분은 분명 아버지셨어요. 아버지께서도 일을 그만두고 싶으셨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자녀들이 자라면서 꼭 영어만은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하셨죠. 어머니도 쉰을 넘긴 연세에 한국어 교육 자격증을 따셔서 태국에서 4년간 일하시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제 삶은 일종의 투쟁의 역사였던 것 같아요. 이제는 부모님도 제가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는 걸 아시고, 결혼에 대해서도 이미 마음을 내려놓으신 상태예요. 제가 어느덧 마흔이 되었으니까요, 더 이상 스물여섯이 아니니까요.
자꾸만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던 변두리의 삶. 가부장적인 집안에서의 반발심, 낯선 땅에서 ‘마이너’로 살아야 했던 경험, 끊임없는 설득과 선택의 과정은 그에게 고단함이자 동시에 힘이 되었다. 남들과 같지 않은 길을 걸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쌓아온 주체성과 자긍심 덕분이었다. 그래서 차쌤은 중요한 순간마다 과감히 자기 길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 선택이 결국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