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 인터뷰에서 친구가 바라본 자신
차쌤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흔히 ‘험지 전문가’로 불린다. 누군가는 피하려는 곳, 그러나 차쌤에게는 배움의 자리였다. 수단의 뜨거운 모래바람, 예멘의 고대 건축물이 늘어선 골목길,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소리가 끊이지 않는 거리까지—그는 늘 현장을 향했다. 그것은 단순한 모험심이 아니라, 어린 시절 케냐에서 본 불평등과 전쟁의 참상이 남긴 질문 때문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그를 가장 먼 곳, 가장 위험한 곳으로 이끌었다.
쌤은 왜 국제개발협력 일을 하고 싶으셨어요?
저는 90년대 초반에 케냐에 있었는데, 그때 소말리아 내전이 심했고 보스니아 내전도 있었어요. 저희 집은 아버지가 직장에서 자주 뉴스위크나 타임즈 같은 잡지를 가져오셨거든요. 집에 그런 매거진이 쌓여 있었죠. 그때 접한 사진이 아직도 기억나요. 소말리아 난민 아기의 눈에는 파리가 잔뜩 앉아 있었고, 입에는 비닐봉지 같은 걸 물고 있었는데, 그게 사실은 어머니의 쪼글쪼글해진 젖이었어요. 또 다른 사진에는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사람들이 있었고요. 저는 그때 굉장히 안락한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국경을 조금만 넘으면, 아니면 케냐 안에서도 이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걸 어린 나이부터 알게 된 거예요. 이 세상이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걸요. 내가 안락하게 지낼 때 다른 사람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 깨달았던 거죠. 그래서 ‘내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개발협력이라는 직업군을 알게 되었어요. 당시 케냐에도 한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이 있었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이런 일을 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쌤은 이후로도 개도국 위주로 현장을 도셨잖아요.
네, 저는 개발협력을 하려면 현장 경험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믿어요. 수단에 처음 갔을 때 우연히 어떤 직원과 대화를 나눴는데, 제가 험지 위주로 다녀보고 싶다고 하니 그분이 ‘빅5’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남수단 같은 나라들이었는데, 그 말이 가슴에 푹 꽂혔어요. ‘아, 저 나라들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죠. 실제로 수단에서 생활해보니 괜찮더라고요. 커리어에도 도움이 되고 생활도 재미있고, 남들이 가보지 않은 나라를 간다는 게 설레기도 했어요.
수단에선 뭐가 제일 좋았어요?
단어로 연상시키자면. 낙타고기. 카르툼(수단의 수도). 그거 아세요? 카르툼은 나일강의 두 수원지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이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이에요.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흘러오는 화이트나일과 에티오피아의 타나 호수에서 흘러오는 블루나일이 만나는 거죠. 블루나일은 이름처럼 물 색이 파래요. 화이트나일은 하얗고요. 화이트나일은 남수단의 습지를 건너면서 90프로가 사라져요. 나머지 10퍼센트가 계속 북쪽 수단으로 향하면서 카르툼에서 블루나일이랑 만나는 거예요. 이쪽은 하얀색, 저쪽은 파란색, 이렇게 물이 섞이는 모습이 눈 앞에서 보여요. 그게 합쳐져서 이집트로 가는 거지.
그리고 수단이 세계에서 피라미드가 제일 많은 나라라는 거 아세요? 수단 피라미드 한번 검색해보세요. 앙증맞은 피라미드들이 있는데, 정삼각형도 아니고 사다리꼴 모양이에요.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그냥 사막 모래 위에 놓여 있어요. 그 앞에서 캠핑도 하고요. 예전에 어떤 이탈리아 도굴꾼이 보석을 찾겠다며 피라미드 꼭대기를 파헤쳐놓은 그래로 지금의 사다리꼴이 된 거예요. 이런 모습들을 보면 ‘이 나라를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아, 맞아요. 그런 데서 느껴지는 묘한 애정이 있어요. 쌤이 어떤 나라에 애정을 가지는 포인트가 저랑 비슷해서 웃음이 나네요.
그런 포인트들이 있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는데, 나만 알고 있자니 아까운 곳들. 그런데 또 나만 아니까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곳들이요.
그리고 수단은 정말 덥잖아요. 실제 온도를 재보면 54도까지 올라가요. 나라 법으로는 49도를 넘으면 긴급 휴일을 선포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항상 공식 발표는 49도로만 해요. 실제로는 더 높은데. 그런 귀여운 포인트들이 있어요.
쌤은 그 이후에 돌아다닌 나라에서도 그렇게 애정을 가진 포인트가 있었어요? 특별히 더 마음이 간 나라가 있나요?
예멘이요. 예멘은 수백년 전부터, 당시 기준으로 고층 건물이라 할 수 있는 10층 넘는 건물들을 지었어요. 예맨 사나(Sana’a)나 시밤(Shibam) 같은 구시가지들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요. 세상에, 그때 이런 건물을 지었다고? 이런 생각이 들어요. 또 절벽 위에 지어진 건축물들도 정말 인상적이고요. 우리나라에서 역사적 건축물 이야기를 하면 보통 파리 에펠탑, 콜로세움, 피라미드 같은 뻔한 곳들이 떠오르잖아요. 그런데 저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걸 제가 알게 될 때 너무 행복해요. 행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꼭 알려주고 싶어져요.
그리고 예멘이 우리나라처럼 분단 국가였거든요. 1990년대에 통일이 됐어요. 그때 어머니가 저한테 우리나라가 유일한 분단국가라고 (싸이프러스가 있긴 했지만요) 말씀해주셨어요. 그리고 “네가 어른이 될 때쯤엔 우리나라도 통일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그 말에 감명을 받아서, 제가 케냐에서 김일성에게 편지를 쓴 적도 있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케냐에 사는 몇 살 ㅇㅇㅇ입니다. 예멘이 통일되었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도 빨리 통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요. 그래서 예맨은 항상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제가 예맨에 갔을 때는 통일이 봉합이 잘 안돼서 다시 분단된 상태였어요. 그런 아이러니도 있었지만요.
저는 사람들이 잘 가보지 않는 곳에 가고 싶어요. 국제기구가 어느 정도 보호막을 제공해주니까, 그 안에서 최대한 모험을 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탄자니아에서 NGO 활동을 하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상대방이 저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협박했지만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 기억 때문에, 안전이 보장되는 단체에서 일한다면 조금은 모험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쌤이 수단, 예멘, 아프가니스탄… 여러 나라에서 일해보면서 느낀 점은 뭐예요?
전쟁을 시작하는 건 참 쉽지만, 끝내는 건 너무 어렵다는 걸 배웠어요. 전쟁은 결국 사람들이 더는 대화를 할 수 없을 때, “이제는 힘으로 끝까지 가보자”는 최악의 소통 방식이잖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관계를 너무 극단으로 몰아가요. 제가 있던 곳에서도 정부군과 반군이 싸우고 있었는데, 같은 회사 안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등을 돌리곤 했어요. 어떤 이는 전쟁이 자국을 위해 잘된 거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외세를 위한 전쟁이라며 끝없이 논쟁하죠. 그렇게 마음들이 극단으로 흘러버린 관계를 다시 동등한 존재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그걸 보면서 세상에 회의감을 느끼셨어요? 아니면 다르게 해석하셨어요?
그저 내가 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쌤이 하셨던 일은 구체적으로 뭐였어요?
저는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조성하고, 성과를 보고하고, 다른 국가나 기업에 홍보하는 역할을 했어요. “우리가 이런 일을 할 테니, 지원해 달라”라고 요청하고, “당신들의 기금으로 이런 성과를 냈다”라고 보고하는 거죠. 예를 들어 한 나라에서 200만 달러를 지원받으면, 그 돈으로 수십 만 명이 6개월 동안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렌트비를 현금으로 지원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수원국 정부가 “현금 말고 텐트로 주면 안 되냐”라고 묻기도 하죠. 그럴 때 저는, 초기 긴급 상황에서는 텐트가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어느 정도 정착한 뒤에는 현금이 사회적인 관계와 삶의 자율성을 지키는 데 훨씬 중요하다고 설득하는 등, 현지의 실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했죠.
쌤이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였어요?
매년 확보해야 하는 자원 목표가 정해져 있었는데, 그걸 채울 때마다 정말 큰 성취감을 느꼈어요. 매년 평균 75% 정도는 채웠어요. 특히 사기업 자금 유치 과정에서 한 기업으로부터 2800만 달러를 조성하는 기록을 세운 적도 있어요.
저도 같은 일을 하고 있어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요. 쌤, 그러면 그렇게 확보한 돈으로, 사람들이 도움을 받잖아요. 보람을 느끼셨나요?
보람 있죠. 저희가 지원하는 학교에 가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본다든지, 그 지역에 없던 화장실이 새로 만들어졌다든지, 그렇게 세워진 병원에 직접 가본다든지. 그럴 때 큰 보람을 느꼈어요. 없던 게 생겨나는 거잖아요. 그게 사람들에게는 텐트든, 매트리스든, 세간살이든, 어떤 것이든간에 우리가 끌어온 돈이 계속 현장에 흘러 들어가는 거니까요. 저는 현장에 있는 게 좋아요. 단순해서 그런지 직접 보지 않으면 감이 잘 안 와요. 물론 정책이나 워크숍도 중요하지만, 저는 흙냄새 맡으면서, 사람들이 물건을 받고 좋아하는 걸 직접 보는 게 좋아요. 그런 단순한 순간들이 좋아요.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어요?
너무 많아서 하나만 꼭 집기는 어렵지만, 수단 난민촌에 있었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난민 대학생 대상 장학금 프로그램을 제가 맡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희 장학금 시스템은 의대를 지원하지 않았어요. 의대생 한 명을 지원하려면 그만큼 다른 학생들을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한 난민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정말 뛰어났어요. 시험만 치면 무조건 일등, 늘 최고였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의대에 합격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 친구만큼은 어떻게든 지원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규정과는 달랐지만 장학금을 주자고 제안했고, 다행히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저는 그 친구가 훌륭한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수단은 특히 여성 할례(성기제거) 문제가 심각하거든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장학금을 받았으니 더 많은 사람을 돕는 위치에 오를 수도 있잖아요. 물론 현재 그 친구가 다른 나라에 정착해서 그저 편안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 또한 그 친구의 행복을 위한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요.
또 기억나는 순간이 있어요. 예멘에서 시리아 난민 아이들을 대상으로 미술 대회를 열었는데, 아이들의 그림이 하나같이 폭탄, 탱크, 사람들이 울고 있고 심지어 목이 잘린 모습들로 가득했어요. 그걸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저는 그 그림들을 모아서 한국에 있는 우리 기구 직원들에게 돌렸어요. “얘네들은 이런 걸 보고 자라고 있다. 이런 세상을 살고 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아이들이 싸움도 참 많이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건, 이 아이들이 평생 폭탄 소리와 총소리 속에서만 살아오다 보니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폭력이 되어버렸다는 거였어요. 또, 하늘에 비행기만 떠도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는 게 습관처럼 배어 있었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전쟁이 아이들의 마음과 몸에 얼마나 깊이 스며드는지를 절실하게 느꼈어요.
인도주의적 프로그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물질적인 지원을 넘어 아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 상상하는 법, 이런 것들을 좀 많이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고요. 쌤은 이 기구에 15년 가까이 있었잖아요. 계속 버틸 수 있었던 힘이나 신념이 뭐예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거요. 기구 특징상 멘데이트가 워낙 뚜렷하잖아요. 단 한번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를 적은 없었어요. 가끔은 비효율적이고 정치적인 속성을 보일 때도 있지만요. 누가 저에게 ‘너 뭐 하는 사람이야?’ 라고 물어봤을 때 ‘나 이거 하는 사람이야’ 라고 답할 수 있는 당당함이 있어요.
차쌤은 15년 동안 자신이 현장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자기 인식이 있었기에 직업 활동 속에서도 중요한 순간마다 주저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었다. 다수가 가는 길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가지 않았고, 효과성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일은 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뉴욕 본부나 방콕 지역사무소처럼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는 곳,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웃음을 되찾는 현장을 선택했다. 그에게 현장은 곧,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대답할 수 있게 해주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