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에서 친구가 바라본 자신
이피디는 어느 자리에 있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특유의 감각과 시선으로 공간을 채운다. 그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언제나 적절한 세련된 질문들을 던진다. 질문자의 역할을 하는 그이기에, 나는 그의 과거나 미래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드물었다. 그렇지만 은은하게 두드러지는 그의 특성이 있다. 바로 그가 취미로나 직업으로나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어떻게 그 길에 닿게 되었을까.
안녕!
이거 배경이 되게 잘 따진다(영상 통화에서 얼굴 누끼가 잘 따진다는 의미).
역시 영상이 가장 먼저 보이나 보네! 그러고보니 어떻게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어?
안 그래도 이걸 제대로 곰곰히 생각해봤어. 나는 표현하는 것에 욕망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 그게 누군가에겐 그림이 또 음악이 될 수도 있지. 나는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해. 내 생각이 미적인 느낌으로 표현되는 걸 즐겨 하는 것 같아. 그래서 영상이란 직업을 택하는 데로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더라고. 영화를 좋아했던 것도 그런 거 때문인 것 같아. 그래서 영화과에 갔어. 영화가 좋으니까 그쪽 일을 하고 싶은데 뭔가 녹록지 않을 거라는 관념이 어릴 때부터 있었지. 근데 또 영상이 계속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다 흘러흘러 지금의 일을 하게 됐어.
영화과는 어떻게 가게 됐어?
영화가 좋아서. 그저 이걸 배우고 싶다, 이런 생각이 컸어. 영화계에서 일하고 싶단 거창한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 사실 고등학교 때는 성적에 맞춰서 경제학과를 갔어. 영화과를 가고 싶었는데 성적이 안 맞았거든. 그런데 대학에 다니는데 너무 재미가 없는 거야. 그래서 편입을 준비해볼까?’ 이런 생각이 든 거야. 그래서 2학년 끝나고 휴학을 하고 편입 준비를 해서 성공한 거지.
편입 성공했을 때는 어땠어?
‘어, 됐다’ ‘이거 되네’ 이런 생각이었어. 그때 편입 시험이 글이었단 말이야. 왠지 잘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어. 이거 뭔가 술술 잘 썼다. 무작위의 단어를 보고 시놉시스를 압축해서 쓰는 그런 문제였어. 그랬는데 진짜 합격한 거야. 막상 들어갔을 때는 좀 힘들었어. 예체능이다 보니까 선후배 수직 관계가 심했어. 그런 쓸데없는 것들 있지. 후배들이 지나가는 선배한테 무조건 복창 인사해야 되고. 아침 댓바람부터 오라 그래서 집합시키고.
영화 공부는 어떘던 것 같아?
처음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그럭저럭 지나간 것 같아. 그런데 편입을 해서 그런지 그 시간들이 너무 짧게 느껴져. 편입했으니까 4년치 공부를 2년 만에 한 거거든. 그래서 흡수를 잘 못하고 졸업한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어. 졸업할 때까지 휘몰아치듯 배우고 뱉어낸 것 같아. 영화를 찍을 줄도 모르는데 들어가자마자 연출해야 되고 이러니까. 1-2학년 때 내가 선배들과 스텝으로 영화 일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면 연출할 때도 더 수월했을 텐데 말이야. 그런 것 없이 바로 투입돼서 연출을 해야 했던 거지.
어떤 영화를 연출했어?
연출 수업 가면 보통 교수님들이 조건을 설정하고 그 제약 안에서 영화를 만들어오라고 시켜. 그때 줬던 과제는 공간 하나만을 이용해서 영화를 만드는 거였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가족 얘기를 담았어. 아아들과 딸이 싸우는데 죽은 아버지가 돌아와서 관계가 안정되는 내용이었어. 처음에는 그 연출이 만만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없는 존재를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게 너무 어려운 거야. 마무리를 할 때 있는 사람인데 없어지는 것처럼 해야 되는 거니까. 내가 영화를 볼 때는 막연하게 그게 쉬워보였거든. 그런데 저예산 학생 영화니까 연출이 어렵더라고. 아버지가 다시 돌아가는데 뒤에 환한 환영을 보여주면서 편집했던 기억이 나네. 영화를 수업에 제출할 수 있을 정도로만 편집하고 같이 연기했던 친구들한텐 보여주지 못했어.
그렇구나, 그래도 그렇게 영상을 만들어본 경험들이 소중하네. 어렸을 적부터 영화과를 가고 싶었던 건가? 계기가 있어?
원래는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어 그러다가 영화라는 장르를 접하는데 감정이 요동치는 거야. 너 〈태극기 휘날리며〉 봤지, 그게 엄청 슬프잖아. 그런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것 같아. 그러다가 ‘영화를 공부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던 거야. 의식의 흐름대로 간 거야.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해?
그때그때 달라. 나는 좋아하는 영화가 항상 갱신되거든. 어떤 사람들은 인생 영화를 꼽기도 하잖아. 나는 그렇게 하나만 꼽기 어려워. 보통은 최근에 봤던 것 중에 가장 좋았던 영화가 생각나. 다만 조용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 것 같아. 판타지 영화 빼고는 거의 다 좋아하거든. 없는 얘기보다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 〈패스트 라이브즈〉 봤어? 그런 영화를 좋아해. 연출적으로도 잘 만들었잖아. 음악이라든지 촬영적으로라든지.
사람 사이의 관계나 심리를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응, 좋아하는 책도 그런 식이야. 구병모 소설가의 〈파과〉를 좋아했었어. 그게 이번에 영화가 되긴 했었는데, 영화는 잘 된 것 같진 않거든. 중년의 여자 킬러가 주인공이야. 그 여자가 퇴물이 된 거야. 거의 은퇴하다시피. 그런데 또 의뢰가 들어온 거야? 거기에 젊은 남자 킬러가 있거든. 젊은 남자 킬러와 여자 킬러가 결국에는 맞붙게 되는 내용이야. 지금 보니 책꽂이에 책이 꽂혀 있네. 지금 책꽂이에 있는 책들 보면 최은영이나 김애란 소설도 있어. 뭐랄까… 누가 보면 ‘우울하다’고 느낄 만한 책들 있지. 고등학교 때 많이 읽었던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이었어. 읽은 적 있어? 워낙 유명한 일본 스릴러 소설 작가니까…
히가시노 게이고를 이야기하니 생각나는 내 고등학교 친구가 있어. 걔도 영화과인데 언니와 책 취향이 겹치네. 무튼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미야 백화점의 기적>은 읽었네.
어, 맞아. 나도 읽었어. 위에도 꽂혀 있다. 〈용의자 X의 헌신〉 알지? 그 소설을 고등학교 때 본 거야. 근데 그게 너무 재밌는 거야. 그래서 수업 시간에 몰래 읽었어. 그 다음에 본 책은 〈악의〉.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중에 지금도 〈악의〉를 제일 좋아해.
왜? 어떤 부분이 좋았어?
반전이 있는 소설이었는데, 이런 내용이야.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내 주변 인물이 결과적으로 ‘악의’가 있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걸 드러내는 내용으로 흘러가거든. 〈올드보이〉 보면 유지태가 누나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오대수를 몇십 년 동안 가두잖아. 누군가는 ‘아니 고작 저런 걸로 사람을 몇십 년을 가둬?’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유지태의 어린 시절 생각하면, 누나와의 관계성이 자기 세상의 전부였잖아. 이 소설에도 그런 면이 있거든. 주인공 남자한테는 굉장히 사소한 사건인데, 그거로 악의를 품게 되면서 어떤 큰 사건을 저지르게 돼. 그걸 묘사하는 과정이 재밌고 흥미로웠거든, 소설 안에서. 그러니까 나는 약간 그런 감정적인 충격을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 같아
(글에는 다루진 않았지만 이피디는 학창 시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본인의 사건사고가 아니라 잘 모르는 동창생의 죽음이라 하기도 했다. 그 당시의 감각들, 날씨, 사람들의 표정과 절규, 소음, 냄새 등을 흑백 화면의 형태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영화 <비밀의 눈동자> 알아? 언니가 좋아할 것 같다. 아르헨티나 영화인데 기억을 되새김질하면서 복수하는 얘기야. 〈올드보이〉를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어.
아 그래? 지금 그 영화 찾아보는데 내용이 숨 막힌다. <올드보이>… 사실 〈올드보이〉에 나오는 정서를 이해하기가 힘들어. 오대수의 말 한마디가 누나를 임신하게 만들고 결국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영화를 보면서 공감을 하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는 거구나.
응, 내 자신을 주인공에 이입해서 동일시하지 않아. 그저 흥미로운 거야. ‘아,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흘러갈 수도 있구나.’ 이런 과정이 신기한 거야. 그러니까 소설이 주는 영항도 그런 거지, 사람에 대한 이해가 좋아지잖아.
이피디의 말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결국 ‘사람’과 ‘감각’에 대한 예민한 관심이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감정이 크게 요동치는 경험을 했고, 그 기억이 영상이라는 매체로 이끌었다. 대학 시절의 치열했던 편입 과정, 학생 영화 제작의 시행착오, 좋아하는 소설과 영화에서 발견한 인간의 복잡한 심리… 이 모든 것이 지금의 이피디를 만든 재료들이다. 영상은 그에게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고 기록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담은 브이로그도 하고 있나보다. 결국, 이피디에게 영상은 가장 자연스럽고도 최적의 커리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