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구자에 대하여(0)

줌아웃 - 인터뷰 전에 내가 바라본 친구

김연구자와 나의 인연은 영국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치에도 적당한 관심을 가지면서 사회문제에 깊이 천착하던 우리는, 한 전직 보좌관님의 소개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같은 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 계기였다. 김연구자의 진중하면서도 따스한 성격 덕분에, 유학 내내 우리는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았다.


김연구자와 나는 같은 기숙사에 살았다. 그 덕분에 함께 저녁을 먹거나, 밤늦게 부엌에서 차를 마시며 긴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일상이었다. 어느 날은 테임즈강변을 따라 학교로 향하던 길이었다. 우뚝 솟은 런던의 빌딩숲을 지나며 우리는 각자의 인생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김연구자는 휴대폰 배경화면에 저장해둔 조선 중기의 학자 김육의 사진을 내보였다. 그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같은 양을 공납하던 세금 제도를 고치고자, 부에 따라 다르게 세금을 내는 대동법을 도입하 안을 제안했다.


김육은 평생을 가난과 불평등을 해결하고자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들의 가난을 우리가 왜 책임져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당신들의 부를 만들어 준 게 그들이니까요.”라고, “땅이 많다고 세금을 더 내라는 게 말이 됩니까?”라는 질문에, “더 내는 게 아닙니다. 당신들이 더 받은 혜택을 돌려주라는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위해 끊임없이 인조와 효종에게 읍소했고, 우의정 시절에도 71세까지 집 한 채 없이 셋집에 살며 청빈하게 살았다 한다. 김연구자는 이 인물을 닮고 싶다 말했다. 나는 그날 강변에서, 김연구자가 실제로 그런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실제로 그는 불평등 문제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다양한 사회문제를 탐구하다가 대학원 초반부터는 화폐 민주화라는 주제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착취적인 금융 산업 구조, 디지털 금융 분배, 기본소득 등 진보적인 의제를 파고들며 연구와 시민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관련 수업을 듣고 논문을 쓰고, 후에 국제결제은행에서 관련 주제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관련 책을 번역 중이라 했는데,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주변의 가장 가까운 친구 다섯 명이 당신 자녀의 모습을 결정한다고. 나는 김연구자를 보며 그 말을 떠올렸다. 언젠가 내 딸이나 아들이 김연구자처럼 자라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세상의 이상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 이상을 진중하게 현실 속에 담아내려 애썼다.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는 늘 따스하면서도 겸허했다. 인품이 선하고 훌륭한 사람은, 그에 맞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김연구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고귀한 진주 같은 사람. 그는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고,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지 않았으며, 이기적인 욕망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그와의 대화는 늘 포근하고 맑았다.


김연구자의 이상적인 선함은 내게 감사한 안전 범퍼였다. 내가 제안하는 다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프로젝트에도 그는 따스한 애정을 보내주었다. 아마 다른 냉소적인 사람에게 말했다면 단번에 헛웃음을 샀을 아이디어들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둘 다 학교 앞에서 잡지를 팔던 ‘빅이슈’ 아저씨에게 자연스레 마음이 갔다. 빅이슈는 노숙을 경험한 이들에게 잡지 판매를 맡겨 자립을 돕는 단체였다. 어느 날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월세조차 내기 어렵고 휴대폰도 고치지 못한다 하셨다. 그래서 나는 작은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할로윈 날 오징어게임 분장을 하고 달고나를 팔아 수익금을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김연구자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알던 영국인 친구가 강변 부두에서 푸드트럭 장사를 하고 있었다. 선한 영향력을 가진 만큼이나 인맥도 넓은 그였다. 덕분에 우리는 장사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고, 달고나 장사 수익금을 아저씨께 전해드릴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아저씨의 삶에 대해 인터뷰도 했다.


그 기억은 달고나 향처럼 잔잔하면서도 달콤하게 남아 있다. 사람은 죽기 직전 수많은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린다 하지 않는가. 내 인생에서 그날은 분명히 스쳐갈 기억 중 하나일 것이다. 달고나 장사를 준비하며 우리는 기숙사 부엌에 모여 판을 벌였다. 이내 달고나 냄새를 맡은 기숙사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열댓 명이 함께 달고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달고나 모양이 뒤죽박죽 튀어나가서 과학 실험 같았지만, 점점 그럴듯한 모양이 나오자 모두가 신이 났다. 그렇게 만든 달고나를 박스에 조심스레 담아 부두까지 들고 가던 우리의 모습. 그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선명하다.


김연구자는 대학원에서 지금의 배우자를 만났다. 리더 기질이 뛰어난 멋쟁이 인도 신사였다. 그는 어느 그룹에서나 단번에 눈에 띄는 변론가였다. 김연구자만큼이나 야망가다. 나는 초반에는 인도 신사에게 설렘을 느끼는 김연구자의 마음을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김연구자의 소개로 그 인도 신사와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국제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김연구자 부부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국제대회에서 1등상을 받고 실제로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인도에서 펼치기로 결정했다. 이때는 김연구자와 인도 신사가 결혼을 앞둔 시점이었다. 나는 인도에서 그들이 어떻게 두 사람의 꿈을 응원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는지 지켜봤다. 토론 과정에서 열정이 튀어나가는 인도 신사와, 그런 그를 묵묵히 보듬어주는 김연구자의 관계는 다정하면서도 역동적인 사회 운동가 부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안타깝게도 인도 방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여러 변수 속에서 팀원들끼리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기 때문이다. 선인인 김연구자만이 그속에서 평온과 따스함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김연구자가 중간에서 곤란했을 상황도 있었다. 그럼에도 김연구자는 언제나 중재자 역할을 하며 따스하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때의 김연구자의 어른스러운 태도에 나는 무한한 감사함을 느낄 뿐이다.


마지막으로 김연구자를 한국에서 봤을 때는 국내 연구소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동글동글한 볼살의 아이를 낳았다. 인도 신사의 도움 덕분에 그는 다행히도 직업 활동을 충분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며칠 전 그의 배우자에게 “요즘 김연구자가 육아로 많이 바쁘지?”라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되물었다. “너 성별 고정관념 있니? 나도 육아로 바쁘단다!” 그말을 듣자 나는 안도가 되었다. '인도 신사가 자상하고 다정한 아빠와 남편 노릇을 똑똑히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또한 낯선 한국땅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 또한 여러 꿈이 많은 사람이기에 자신의 것을 희생하고 한국땅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었을 테다. 그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보낸다.


최근에 김연구자는 인도로 넘어간 것 같다. 인도서 이마 한가운데 빨간 점을 찍고 시댁살이를 하는 김연구자의 모습을 보면,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의 김육같은 청빈한 품성을 가진 그가 인도에 가정을 꾸리고, 앞으로 펼쳐나갈 삶은 얼마나 곧으며 아름다울까.


이글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김연구자의 삶이 얼마나 다채롭고 의로웠는지를.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어느 시점에서든 기록될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는 후에 김연구자의 삶이 제대로 기록되기 전에, 초벌 작업을 하다는 마음으로 김연구자를 인터뷰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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