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건으로부터 #4 >
-바뀐 시간에 관하여
요즘 다시 매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작업실컴을 켜고 시계를 보면 오전 7시에서 8시 사이일 때가 많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까지 잠을 못 자고 꼬박 날을 지새운 후의 시간일 텐데 지금은 다르다.
아토피 신약 듀피젠트 치료 시작한 후, 효과가 좋아 나는 잠을 잔다.
예전의 그 '잠'이 아닌 진짜 '잠'. 아토피는 나에게서 여러 가지 것을 빼앗어 갔는데 그중에 '잠'이 있다.
아토피 용어 중에 '아토피행진(Atopy March)'이라는 게 있는데 아토피가 발병한 후 순차적으로 비염, 부비동염, 천식 등의 온갖 알레르기 질환들이 따라오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질환 말고 아토피는 이렇게 악순환의 행진도 하는데
아토피가 심해지면 잠을 못 자고 잠을 못 자면 몸이 망가지고 몸이 망가지면 아토피가 심해지고.. 뭐 이렇게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는 것을 말한다.
자려고 누워서 몇 시간이고 그냥 수면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가 몇 달 몇 년 몇십 년이 진행된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 시간의 개념도 매우 흐릿해지게 되는데 내가 낭비하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그냥 시간이 흘러가게 된다.'보통의 불면증과 비슷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면 많이 다른 게 그냥 잠만 못 자는 게 아니라 피부상태가 박살 난 상황에서 못 자는 거라 그 고통이 훨씬 가중된다.
불면의 고통+피부고통, 그러니까 정신정인 고통과 물리적인 고통이 한꺼번에 쓰나미 밀려오듯 매일 반복된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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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나는 몇십 년 만에 잠을 자고 있다.
이 시계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계다.
사이즈가 작은 시계가 아닌 벽에 걸 수 있는 대형스와치 시계인데, 내가 구입한 것을 친한 플레이모빌 커스텀 작가 형님이 내 그림으로 커스텀해서 선물해 주신 것이다.
한동안 나의 시간은 귀엽지 않았다.
언제나 일정 부분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아토피가 굉장히 심해지던 시기에는 그 시간이 그냥 날아가는 것 같아 너무 억울하기도 안타깝기도 해서 시계 보는 것을 싫어했다.
팔목의 피부가 너무 상했을 때는 시계를 찰 수도 없어 나는 원래 시계와 먼 사람이기도 했다.
핸드폰시절이 오고 스마트폰 시절로 가는 동안 시간을 보는 용도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넘어가기도 했지만
어쨌든 인생 전체로 보면 드문드문 구멍 난 시절은 거의 아토피가 훔쳐간 시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전 작업실에는 시계가 없었다.
형님이 이 시계를 선물해 줬을 때 나는 이 시계를 작업실벽에 걸었다.
나는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
그건 나이와 상관없다.
지금의 시대는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귀엽고 멋있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그게 비단 외형적으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는 그런 미감이 숨어있다. 시간에도 귀여운 구간이 있다. 사람에게도 귀여운 성격이 있다.
보이는 것에서 아름답고 멋있는 것이 첫 번째 도착점이라면 외피를 뚫고 나오는 아름다움과 멋있음이
진짜일 때도 많다.
나는 이 시계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어차피 흘러가는 시간이라 최대한 행복하게, 귀엽게 보내보자 하는.
그래서 귀여운 것을 그리고 쓰는지 모른다.
일종의 아토피 탈출구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나마 나는 골방에 갇힌 시절에도 외부와 연결된 온라인으로 그림이라도 그리고 글이라도 쓸 수 있어서 그 시간을 버틴것이기도 하다.
거의 40여 년 만에 단 잠을 잔다.
잠들기 전 본 시간에서 깨어난 후 보는 시간의 차이를 몇십 년 만에 느낀다.
어차피 갇혀있어야 하는 시간이라면, 어차피 이리 보내야 하는 시간이라면,
무엇이라도 남겨야겠다.
귀엽게라도 보내야겠다.
그런 마음이, 나는 아직도 유효하고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