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작은 강의실에서

by 페리테일


- 스프링 연습장 하나면 시간위를 매우 빠르게 달릴수 있었다 >


제가 유일하게 다닌 학원은 미술학원이었다고 얘기했었죠? 네, 맞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다닌 입시 미술학원이 제가 정식으로 다닌 유일한 학원, 학교 외 과외수업이었어요.

하지만 중학교 시절에 학원에 다닐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다니기는 했었는데…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날이었습니다.

방에서 나가보니 마루에서 어머니가 처음 보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물건을 팔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팔러 온 물건은 국・영・수 강의를 녹음해놓은 테이프 세트.

지금은 인강이라 해서 인터넷으로 다 넘어갔지만

그때는 이렇게 책과 녹음된 강의 테이프를 묶어서 팔고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에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서(라고 쓰고 일종의 사기) 강의 테이프를 팔았습니다.


“어머니, 이 강의 테이프 세트를 사시면 학원에서 수업도 같이 해줍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학원에 다니는데 당신 아들은 아무 데도 못 보내니 그 소리에 어머니가 혹했던 것이죠.

아무튼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큰마음 먹고 그 테이프 세트를 샀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헌재야, 너도 이제 학원 다닐 수 있다. 공부 열심히 해.”


어머니는 아들이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어서 아주 좋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제가 살던 집은 서울 성내역 앞(지금은 잠실나루역)에 있는 시영아파트였고

테이프를 팔면서 연계 수업을 받게 해준다는 학원은 우리 집에서 전철을 타고 두 정거장을 가면 되는

신천역 앞(지금은 잠실새내역)에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 학원에 가게 된 거라 역까지 걸어가는 걸음부터 신나서 반쯤은 걷고 반쯤은 뛰었던 것 같습니다.

부푼 마음을 안고 학원에 도착한 저는 원장이라는 사람과 함께 작은 강의실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


“자, 여기서 공부하고 있어.”


아이들은 다른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고

저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갖고 오라고 한,

어머니가 산 그 교재 세트에 같이 딸린 문제집을 풀었어요.

그리고 한 시간 동안 그 교실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첫날이라 그런가?’


하지만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다음에 갔을 때도, 그다음에 갔을 때도

저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테이프를 듣고 문제집을 풀어야 했어요.


세 번째 갔던 날,

그 원장이라는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 어머니가 그러는데 여기서 수업받을 수 있다고….”


“아~! 수업받으려면 따로 수업료 내고, 신청해야 해.”


“이 교재 사면 같이….”


“응. 너 학원 나와서 공부하고 있잖아. 그거야.”


네. 교재 세트만 사면 학원 강의도 듣게 해준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교재를 팔려는, 학원 수업을 따로 등록하게 하려는 일종의 사기 같은 거였죠.

중학생인 저도 당연히 어머니가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전철을 타지 않고 집까지 걸어갔습니다.

2호선 신천역에서 성내역까지 걸어오는 동안 속이 울렁거렸어요.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과 인사하고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는데

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문제집을 풀다 보면

뭔가 분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어요. 그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에게 말할 수가 없었어요.

어차피 학원비를 따로 받을 수도 없는 데다

어머니가 속았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학원에 다니게 되어서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그 기분을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두 달 동안 학원에 갔습니다.

학원 원장은 제가 계속 나오자 당황했고 학원 아이들도


‘쟤는 뭐지?’


하고 절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아마도 덩그러니 혼자 교실에 몇 번 있게 되면 안 나오거나,

아니면 정식으로 등록할 줄 알았을 겁니다.

그렇게 두 달을 나가고 어머니께는 이제 돈을 내야 하는데,

다녀보니 별로라서 그만 다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몇십 년이 지난 일이지만 저도 그 두 달의 시간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일 나가셔서 밤에 돌아오는 당신이, 그래도 아들을 학원에라도 보내 남들처럼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안도감을, 저는 깨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그런 사람들과 싸우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원장이라는 사람이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스프링 연습장 하나면 만화 그리는 것만으로 혼자서 몇 시간은 있을 수 있었거든요.

여름날의 오후, 에어컨도 틀어주지 않아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작은 강의실에는

귀여운 것을 그리며 한 시간을 5분으로 만드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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