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에 대비한 삶

by 페리테일

< 고장에 대비한 삶 >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그림으로 돈을 번 후

평생을 컴퓨터와 온라인에 연결된 삶을 살다 보니

작업용 컴퓨터가 고장 나거나 인터넷이 안 되면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따로 노트북을 사고,

들고 다니면서 그림 그릴 수 있는 컴퓨터와 액정 태블릿이 붙어 있는

모바일스튜디오까지(국내 출시 전이라 해외 구매) 갖추고

보조 컴퓨터에 이것저것 장비를 마구 들이던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은 다 정리하고 아이패드, 미니 요 정도만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뭐랄까, 엄청난 대비라고 해놓고

이것저것 쟁여놓던 시절을 지나면서 결국 그것들은 자기의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모습을 보았으니까요. 몇백만 원짜리 맥북도,

외국에서 일부러 사다 달라고 부탁한 모바일스튜디오도,

여분의 카메라도,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정해져 있음을 알고는 전부 다 정리했습니다.


느긋하게 마감을 해놓고는

새벽에 파일을 보내고 자야지 하는데

딱 그 타이밍에 인터넷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전에도 제가 사용하는 통신사가 그런 적이 있어

통신 장애인가 하는 생각에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그런 글은 올라오지 않고 그 새벽에 전화까지 해보니

우리 집 공유기가 고장 나버린 거예요.


‘아, 타이밍이!!’


아, 맞아요. 전에 가지고 있던 노트북을 팔지 않았다면

컴퓨터랑 연결해서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그냥 동네 어디에나 있는 5분 거리 피시방에 가서

30분에 1,000원, 비회원으로 결제하고 파일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00만 년 만의 피시방 구경이었습니다)


공유기 고장은 하루 뒤 기사님이 오셔서 해결해주실 것 같고요.

사실 이런 마음이 된 것은 그 시간을 모두 지나온 덕분입니다.

필요 없는 것들은 덜어내, 조금 더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

그건 물건을 안 사거나 욕망이 사라졌다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좋은 것, 마음에 드는 것, 예쁜 것들을 삽니다.

다만 어떤, 보이지 않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대비한다고 스스로 끝없는 스트레스를 주며

무언가를 쟁여놓지 않는다는 거죠.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비한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오히려 대비한다면서 계속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 일들도 많더라고요.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 일이 벌어진 후에 대한 저의 태도입니다.

지금은 그게 제일 중요해요


제게는

고장나지 않는 삶보다

고장난 후의 삶이 더 중요해요.


고장나면 고치면 되고

안되면 될때까지 기다리는 것,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걸어가는 것.


우리는 그냥

수다나 떨면서

커피한잔 마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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