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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테일 Mar 15. 2022

노래방에 도른자들이 있었습니다


#귀여운거그려서20년살아남았습니다


노래방에 도른자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입시미술학에 처음 간 게 고 2 때였습니다.

고2는 예비반이었는데 숫자는 많지 않았어요.

남자 , 여자  이정도밖에 없었죠.

입시생이 되었을때 친구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우리 학원은 이상한 학원이었습니다.

노래방….

노래방에 미친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이었어요. -_-;;

맨 처음 시작이 언제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안나는데

고3때였던 것 같아요.

학원수업은 오후 6시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나는데

학원 끝나면 노래방을 갑니다.

틈만 나면요.돈만 모이면요.

학원생들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었고

저와 친한 친구들은 모두

노래방에 ‘도른자’들이었어요.

제가 대학에 들어가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우리는 거의 매일 노래방을 갔습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이 된 상태라 그러면 안 되었지만

말이 선생님이지 대학 1학년 새끼 강사였고

같이 다니던 제 동기친구들중 몇몇은 재수하고 있었고

예전에 저한테 형, 오빠 하던 애들이

갑자기 절 선생님 대하듯 하지는 않으니까요.

(학원 안에서는 물론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그렇다고 무슨 술 마시고 (가끔은 그런 때도 있었지만)

정신없이 노느라 다닌 거냐 또 그거랑은 좀 다릅니다.

이 노래방 멤버들은

진짜 노래를 부르러 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노래방에 노래 부르러 가지’


아니요. 제가 대학 가서 동기들하고

처음 노래방 가서 충격받은 게 무엇이었냐면

순서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_-;;

그리고 중간에 노래를 끊는다는 것도요.


‘순서? 노래방에서 무슨 순서가 있어?’

‘1절만 하고 막 끄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니야?’


예. 저희는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 학원 노래방 도른자들은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 순서라는 게 누가 먼저 이런 것은 아니고

돌아가면서 한곡씩 불러요.

중간에 끊고 이런 거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노래 부르면 다 들어요.

같이 부르기도 하고요.

게다가 뭐뭐 불러달라고 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그게 노래방 룰인 줄 알았어요. -_-;;

그야말로 노래 부르러, 노래 들으러 가는 거예요.

저는 노래방 가면 다 그렇게 노는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노래를 다들 잘합니다.

누구는 랩을 잘하고 누구는 발라드를 잘 부르고..

그냥 다들 잘합니다.

학원 앞 노래방 사장님은

매일 출근도장 찍다시피 하는 저희들에게

미안해서인지(라고 쓰고 단골 관리라 읽는다)

돈이 조금 모자라도 1시간 막 이렇게 넣어주셨어요.

(지금은 코인 노래방이 대세지만

그때는 시간으로 하던 시절)

심지어 잠시 외출할 때 노래방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저희가 오면 그냥 부르다 지쳐 갈 때까지

시간을 무한으로 넣어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요.

같이 간 친구들이 모두 나가떨어져서 자고

혼자만 꿋꿋이 남아 노래를 부르던....

주인아저씨가 창문으로 슬쩍

 ‘쟤네 언제 가냐?’사인을 주는데도

마지막까지 남아서 노래 부르던 친구....





그게

바로 나.... -_-;;;


————————————————


영원한 것은 없는 것처럼

노래방에 도른 우리들도

각자 대학을 가고 학원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 되었습니다.

그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노래방 간 게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네요.

모두 각자의 삶을 잘 살고 있습니다.

연락하는 친구들도 있고

어떤 친구와는 이제 연락이 되지 않아요.

사이가 안 좋아져서도 아니고

그냥 각자의 삶을 사느라 그렇게 된 겁니다.


————————————————-


노래방에서 누구도

다른 이의 노래에 태클을 걸지 않고

모두가 들어주는 경험.

한 명이 돈이 없어도 다른 친구가

꼬깃꼬깃 천 원짜리 한 장 더 내서 같이하는 경험.

그것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경험.

제가 살면서

물리적으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해본 것이

그림 그리는 것과 노래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학원에서 그림 그리다 지쳐서 박스 깔고 자보고

노래방에서 밤새 노래 부르다

새벽 4시에 사장님과 같이 문 닫고 나오는

이상한 경험 -_-;;

‘내가 더 이상 못할 때까지 해본다’라는 몰입의 경험은

제 이후의 삶에 꽤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나는 직업이 되었고

하나는 그냥 취미로 남아서 살아있습니다.



1995년의 길동의 한 미술학원에는

노래방에 도른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

https://www.instagram.com/pery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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