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뽑아주지 않으면>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듯
저도 그동안 냈던 책의 첫 원고(손으로 직접 쓴 것)와 프린트를 모두 박스에 담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사 때문에 짐을 정리하다 초창기 투고 봉투를 봤어요. 소인 찍힌 날짜가 2001년 3월 20일이네요.
제가 좋아하던 잡지 < 페이퍼 >에 원고를 보내고 < 페이퍼 > 에서 검토해 보고 돌려보내 준 것입니다.
원래 원고는 거의 돌려주지 않는데 그때 제가 밖에 나갈 수 없기도 했고
손 글씨 원고 그대로 책을 내고 싶어서 육필 원고를 보냈었어요.
원고지에 쓴 것도 아니고 그냥 흰 종이에 그리고 쓴 말도 안 되는 원고.(-_-;;;)
2000년부터 2002년 초까지 제가 알 수 있는 거의 모든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고 모두 퇴짜 맞았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그리고 쓴 원고가 마음에 걸려서인지 출판사들 대부분 원고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고마움을 아직도 품고 살아요.
이런 따뜻하고 귀여운 마음이 계속할 힘을 주곤 합니다.
아무튼 원고를 보낼 때마다 항상 될 것 같았어요.
뽑힐 것 같은 마음으로 두근두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죠. 시도를 하고 안 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로또도 될 것 같은 마음을 품고 사는데요…
원고는 계속 돌아왔습니다.
‘아, 왜 안 뽑혔지?’
원고가 돌아오면 버릴 건 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대단한 퇴고 과정을 거치는 게 아니라 그냥 쓰고 그리기를 반복했어요. 네. 원고는 계속 돌아왔습니다.
그때의 원고들이 모여서 첫 책 《포엠툰》이 되었습니다. ————-
책은 운 좋게 굉장히 잘되었습니다.
20년을 쉬지 않고 썼지만, 아직도
제 첫 번째 책《포엠툰》과 두 번째 책 《완두콩》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낸 12권의 책 중에 제일 많이 팔려서 제일 많은 독자가 만난 책이니까요.
결과적으로 제겐 잘된 일이었지만 원고를 돌려보낸 출판사들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원고를 보낸 곳에서 책을 내주었다면
그렇게 잘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시에 퇴짜 맞은 원고는 거의 다 수정하고 추가해서 바뀌었고 마침 일어난 인터넷 붐으로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먼저 그림을 올리고 그것으로 독자를 모을 수 있었으니까요.
2년 동안 이어진 거절과 실패의 기억은 퇴짜 맞는 것에 대한 작은 ‘면역’을 주었습니다.
일종의 백신 같은 거죠.
백신을 맞으면 그 병에 영원히 걸리지 않는 게 아니라 걸려도 덜 아픈 것처럼, ‘실패 백신’과 ‘거절 백신’을 줄기차게 맞고 제 기억 세포에 ‘실패와 거절’이 새겨진 후로 수없이 같은 일들이 반복되었지만, 녹다운될 만큼 아프지 않았습니다.
참, 그때 또 좋은 걸 배운 게 있습니다.
아, 나는 그림으로만은 안 되는구나. 그럼, 글을 써서 붙여야지. 아! 글을 붙여도 안 되는구나. 그럼 사진을 찍어 넣어야지. 아! 그걸로도 안 되는구나. 그런 말을 해서 들려줘야지 노래를 불러봐야지. 거기에다 다시 글을 써야지. 그 안에 그림을 그려 넣어야지. 홈페이지를 만들어야지. 블로그를 해야지. 트위터를 해야지. 페이스북을, 인스타를, 유튜브를, 브런치를…
아, 새로운 서비스가 나왔다고? 해야지. 저기에도 보내야지 여기에도 보내야지.
이 사람한테도 말해야지. 저분한테도 제안해야지.
나는 귀엽지 않으니까 그림이라도 귀엽게 그려야지.
아무도 뽑아주지 않으면 내가 나를 뽑아줘야지.
아무도 나에게 일을 주지 않으면 내가 일을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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