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여행(청춘카페 3호점에서)
얼마 전, 정년퇴직을 하신 선생님께서 마지막 인사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해야 하는 일로 채웠던 저의 하루를 하고 싶은 일들로 채우며 지내고 싶다
그 말씀이 어찌나 가슴 찡하게 다가오던지요.
저 역시 오랫동안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봤자, 결국 여러 이유로 하지 못할 테니까 아예 그런 생각을 차단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그게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하지만 요즘은 의식적으로라도 나의 ‘욕구’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개인 상담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20대부터 상담자가 되기 위한 훈련 과정으로 상담을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동료 상담자에게 개인적으로 고민 상담을 받긴 했지만, 정식으로 센터를 찾아가 상담을 받은 경험은 두 번 뿐입니다.
첫 번째는 아이를 임신했을 무렵이었습니다. 나쁜 모성의 되물림을 하지 않는 엄마가 되기 위해, 제 과거를 정리하는 상담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엄마로서의 역할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지금,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며 받았습니다.
마지막 상담시간 상담자는 저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려서는 엄마를 돌보며 살았고,
커서는 아이를 돌보면서 사셨어요.
이제는 자신을 돌보며 사실 때입니다.
그 말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 꺼내어 음미해 봅니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도 괜찮다’는 면죄부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어요. 왜 저는 항상 ‘나는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먼저 돌봐야 한다는 지나친 책임감을 안고 살아왔을까요? 이제는 그 무게를 조금 내려놓고, 저 자신을 살펴보고 돌보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요즘은 사람들로부터 “정년 후엔 뭘 하실 거예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그럴 때 저는 “정년까지 열심히 일하고, 그 후에는 쉬고 싶어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면 대체로 놀랍니다. “100세 시대에 무슨 철없는 소리냐”는 반응도 있고, “그 귀한 상담 실력을 왜 묵혀두냐”라고 하기도 하며, “쉴 거면 지금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느냐”는 질문도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퇴직 후엔, 하고 싶은 일들로 하루를 채우고 싶어요. 자연과 함께 걷고, 건강하게 집밥을 해 먹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브런치에 글을 하나 올리고... 그렇게 보내다 보면 하루가 금세 채워질 것 같아요. 경제 활동을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제 남편과 함께 다녀온 여주 여행에서 노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목적지는 새롭게 개통된 ‘출렁다리’였지만, 저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은 바로 여주박물관 내의 청춘카페 3호점이었습니다.
청춘카페는 여주시 노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카페로, 어르신들이 직접 일하시는 공간입니다. 멋지게 페도라를 쓰시고 앞치마를 두르신 어르신들의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가격도 무척 저렴해서 남편과 저는 미숫가루 2잔과 커피 1잔, 총 세 잔을 마셨는데, 그 가격이 일반 카페의 음료 한 잔 값 정도였습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남편과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희는 취향이 워낙 달라서 꿈꾸는 노후의 모습도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서로를 배려하며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삶을 존중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그동안은 자녀를 위해, 가족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하며 살아왔으니까요.
사실 새롭게 개통한 출렁다리를 보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정작 제 마음을 울린 것은 박물관 안의 조용한 청춘카페였습니다. 저의 여행 취향이, 조금은 마이너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하루하루를, ‘하고 싶은 일들’로 채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저 자신을 위한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내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