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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Jan 27. 2024

수수께끼를 살아가는 청춘의 분노 -2-

영화《버닝》(이창동, 2018)

 수수께끼를 향한 분노

 오정미 각본가가 영화 시나리오 초고 제목을 ‘분노 프로젝트’로 쓴 만큼, 세상을 향한 근원 불명의 분노가 영화를 지배하고 있다. 다만 관객은 종수의 분노를 영화 내에서 뚜렷하게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는 종수가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분명하게 종수의 분노를 가청화(可聽化,) 가시화(可視化)하여 보여준다.


 본 영화는 주변 소리(Ambient Sound)를 그대로 담아내어 현장감과 몰입감을 높이지만, 몇몇 장면에서 ‘Burning’이라는 제목의 배경 음악을 배치함으로써 종수의 심리를 강조한다. 종수의 분노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벤에 대한 분노로 구분된다. 먼저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다. 아버지가 살던 파주 집으로 이사 간 종수가 집 내부를 살피는 장면에서 배경 음악은 흐르기 시작한다. 종수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는 어질러진 집안을 비추는 끝에 아버지와 어린 종수가 함께 찍힌 사진에 머무는데, 이것은 종수의 분노가 아버지로부터 대물림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실형 선고를 받은 뒤 그가 매달렸던 축산업의 유산인 송아지를 판매하는 종수의 장면에도 내면의 분노는 드러난다.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조깅하는 종수를 비추며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 ‘Burning’은 그의 속 어딘가에 분노가 타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분노는 벤의 등장 이후 더욱 타기 시작한다. 벤은 케냐 공항에서 해미와 함께 고립되었던 인물이며, 종수와 다르게 물질적 ․ 심적으로 여유롭다. 종수의 눈으로 보이는 벤은 자신과 해미 사이의 관계에 갑작스레 끼어들어 열등감을 유발하게 만드는 존재다. 영화는 종수와 벤을 대조하기 위해 각자의 삶을 대표하는 집을 비교한다. 어지럽고 오래된 종수의 집과 깔끔하고 현대적인 벤의 집을 대조하며 벤을 향한 종수의 분노를 정당화한다. 그뿐만 아니라 조명을 통한 한난대비(寒暖對比)를 활용하여 둘의 차이를 더욱 강조한다. 벤의 집은 늘 주황빛의 조명이 켜져 있으며 따뜻한 색감으로 장면이 연출되지만, 종수의 집은 늘 차가운 기운이 감돌며, 장면 역시 푸른 색감으로 연출된다. 대조되는 표현 방식을 통해, 관객은 벤을 향한 종수의 분노에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종수가 벤에게 분노를 느끼는 장면에서 배경 음악을 활용함으로써 그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예컨대, 해미와 벤이 귀국한 뒤 종수가 해미를 벤의 포르쉐에 태워 보내는 장면, 해미가 추는 부시먼족의 춤을 보며 하품하는 벤을 보는 종수의 장면 등이 그렇다. 그렇게 내면에서 조용히 타오르던 벤을 향한 종수의 분노는 파주 집에 종수와 해미, 벤이 함께 밤을 보낸 날 이후 더욱 거세진다. “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벤에게서 비밀스러운 취미를 들은 종수는 그날 이후 자기 집 근처 낡은 비닐하우스 중 불탄 것이 있는지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해미와의 연락이 갑작스레 두절되자 초조함을 느낀다. 어스름한 새벽, 종수는 동네를 뛰어다니며 여러 곳의 낡고 버려진 비닐하우스들을 확인한다. 그 시퀀스에서 또다시 배경 음악이 흐르며 종수의 심리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어쩌면 이 시점부터 종수는 벤이 태운다고 한 비닐하우스가 단순히 그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리라 추측하지 않았을까. 근처의 모든 비닐하우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이후 해미에 다시 전화를 건 종수의 모습은 그러한 분석에 힘을 싣는다. 이후 종수는 해미의 집주인, 직장 동료 텔레마케터, 팬터마임 선생님을 찾아갔으나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또다시 배경 음악 ‘Burning’이 흘러나오며 종수의 분노와 불안을 관객이 주시하도록 한다.


 결국 종수는 벤이 해미의 살해자라고 생각한다. 종수에게 감정 이입한 채 사건을 보는 관객은 그의 추측에 당연히 동의한다. 종수에게 해미는 특별한 존재였었기 때문이다. “씨발, 난 해미를 사랑한다고.” 종수는 욕설까지 섞으며 해미에 대한 감정을 강조했으나 벤은 달랐다. 해미가 사라진 이후, 해미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또 다른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은 그가 해미에게 가졌던 감정이 특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재미만 있으면 난 뭐든지 해.” 벤이 해미를 대했던 태도는 종수의 분노에 관객이 탑승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종수의 추측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 뒤, 배경 음악을 통해서만 드러나던 종수의 분노는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종수의 의상을 통해 가시화되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종수는 평소 어둡거나 푸른 계열의 옷을 입지만, 해미 실종 후 벤과 대화할 때마다 회색 외투에 붉은색 맨투맨을 받쳐 입는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인물을 만날 때에는 이전과 같은 어둡고 푸른 계열의 옷을 입는다. 굳이 벤과 직접 대면할 때만 붉은 맨투맨을 입은 연출에는 영화적 의도가 다분하다. 그렇기에 외투 지퍼가 열린 사이로 보이는 맨투맨의 붉은빛은 종수의 분노를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분노를 드러내기 시작한 종수는 벤의 일상을 감시한다. 벤은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가족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그들과 함께 미술품이 전시된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다. 해미의 실종 이후 더욱 초조해진 자신과는 대조되는 여유로운 삶을 사는 벤에게 화가 난 종수는 계속해서 그를 추격하는데, 그때도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며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영화의 종결부에서 분노의 근원을 벤으로 정의한 종수는 그를 살해하고 시체를 자동차와 함께 불태운다. 또한 종수의 붉은색 맨투맨 역시 벤의 시체와 함께 태워지는데, 이는 종수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명령으로 태운 엄마 옷의 변주다. 붉은색 맨투맨으로 변주된 엄마의 옷은 다시 벤으로 변주된다. 카메라는 불타는 벤의 자동차를 뒤로한 채 달려가는 종수의 복잡한 표정을 비춘다. 돌아가는 트럭 안에서 종수는, 자신에게 엄마의 옷을 태워버리라고 말한 아버지의 분노에 공감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분노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깨달았을 것이다. 곧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Burning’은 이러한 분석에 힘을 싣는다. 살인 장면이 아니라 살인 이후의 종수를 보여주며 배경 음악을 가미한 연출은 눈여겨 볼만하기 때문이다. 이는 벤을 살해함으로써 해소될 줄 알았던 종수의 근원적 분노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한즉, 타고 있는 종수의 분노는 벤 때문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종수는 왜 자신 분노의 근원을 벤이라고 정의한 것일까? 사실 종수는 벤을 만나기 전부터 부조리한 세상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지만, 아무런 소설도 쓰지 못했다. 세상에 대해 아무 정의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답답함은 결국 분노 섞인 종수의 말로 표현된다. “저는 뭐를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한테 세상은 수수께끼 같아요.” 그런 종수의 앞에 나타난 벤은 자신과는 너무 다른 인물이었다. 종수의 한탄에는 벤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이 존재했다.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 그러한 벤이 해미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자, 종수는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된 분노를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분노의 근원을 벤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종수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분노로부터 전유받은 자신의 화의 근원은 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약 벤을 살해한 뒤 종수의 분노가 사라졌다면, 종수라는 인물은 지금만큼 공감을 얻지 못했으리라. 세상을 향한 청춘의 분노는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다. 그 분노는 사랑과 계급의 갈등을 초월하여 수수께끼 같은 세상 자체를 향해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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