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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ssence Feb 19. 2024

프랑스인과 독일인이 만났으니 영어를 쓰는게 맞다고?

'추락의 해부'를 보고 돌아오며



(영화 '추락의 해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언어 권력'의 개념은 언어가 사회 내에서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권력을 행사하고,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영화 '추락의 해부'를 연출한 쥐스틴 트리에는 인터뷰에서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커플 사이의 삶을 묘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에 '추락의 해부'는 서로 다른 언어(독일인 산드라와 프랑스인 사뮈엘 사이의 소통 언어는 영어)를 사용하는 커플을 등장시켜 언어 권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여러 장면을 제공한다.


작품 내에서 산드라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고, 극히 일부 상황에서 독일어를 사용한다. 작품 내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그 언어에 익숙하고 그렇지 않음에 따라 산드라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요소가 되기도 하고, 작품 내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추락의 해부에서 재판 중에 들리는 부부싸움 녹음에서 사뮈엘은 우리 대화가 영어로 진행되는 거 자체도 불합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산드라는 너는 프랑스인이고 나는 독일인이니까 영어를 선택한 거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영어를 제외한 외국어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흔한 농담이 있다. 많이들 아는 내용일 것이다.

‘프랑스어를 배우면 아프리카에 파견되고, 스페인어를 배우면 남미로 파견된다. 독일어를 배우면 독일인이 이미 영어를 잘해서 독일어를 쓸 곳을 찾기가 어렵다.’

그만큼 독일인은 영어를 잘한다는 내용인데, 실제로 독일은 전 세계적으로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나라에 속하고, 프랑스는 영어 실력이 하위권을 전전하는 편이다.     


독일인 산드라와 프랑스인 사뮈엘의 이전까지의 대화가 영어로 진행되었으면, 누구의 뜻이 더 원활하게 전달되었을지는 뻔한 일이다. 결국 둘 사이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대화 자체가 부부 사이의 권력이 어느 쪽으로 쏠려 있을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뮈엘이 부부싸움 중 부부의 대화가 영어로 진행되는 걸 언급하는 것이다. 산드라는 그것이 중간에서 만난 거 아니냐고 이야기하지만, 평균적인 독일인과 프랑스인의 영어 실력을 고려했을 때, 전혀 중간에서 만난 게 아니다.     


더군다나 작품 내에서 산드라는 사건 1년 후의 재판에서 상당히 향상된 불어 실력을 선보인다. 재판에서 자신을 방어할 정도의 불어 실력을 키울 정도면 (물론 중간에 영어로 언어 선택을 바꾸긴 하지만) 진작 실력을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산드라는 사뮈엘의 죽음 이후 급격하게 프랑스어를 써야 하게 된다.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하기도 하고, 법무부 직원 앞에서는 다니엘과 영어로 대화할 수 없기도 하다. 즉 공권력에 의해 언어 선택이 제한된 상황에서 프랑스어를 쓰다 보니 발전한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사뮈엘의 죽음 전에는 프랑스어로 다가갈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부부와 가족 사이 언어 권력에서 이미 본인이 우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집에 돌아온 산드라는 다니엘에게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데, 재판을 통해 조금 더 아이에게 다가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영화는 다중 언어를 쓰는 가족을 통해 언어 권력의 예시를 효과적으로 묘사하며, 영화가 훌륭한 이유에 한 가지를 더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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