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를 보다가 문득 성공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에 빠졌다. 나는 MBC "성공신화"를 보면서 자란 세대이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정주영, 이병철이 되길 원했고, 이름을 알리고 돈을 많이 벌면 성공하는 인생이라고 배우면서 살았다. 누구나 성공한 사람에 대해 떠들기 좋아했다. 그들의 성공 체험담은 다큐멘터리나 책을 통해 언제나 세상에 공유되었고, 그 공유는 핫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담을 읽으며 살아온 나는, 그들의 방식을 내 삶에 녹여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어른이 되기 전 나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성공'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만의 성공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인은 이런 내 생각이 성공하지 못한 패배자의 핑계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내면이 어느 정도 단단해진 이제는 그 말에 상처받지 않는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행복한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성공에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때가 있다고, 그 "때"라는 것은 일찍 찾아올 수도 있고 늦게 찾아올 수도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이어가라고 한다. 20대 때는 그 순간의 삶이 전부인 것 같았지만, 30대가 되어서는 세상의 풍파와 행복을 여러 차례 겪어보니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행복하지 못한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보고, 한 순간 때를 만나 인기가 폭발했던 인플루언서들이 그 인기를 지켜내기 위해 번아웃이 되거나 망가지는 모습들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파워 N이다. 그래서 생각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들이 즐겁다.)
그러다 나는 우연한 첫 번째의 성공이 아닌,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때를 만나 성공하면, 그다음은 첫 번째 성공보다 어렵다. 그리고 그 성공이 일찍 시작될수록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 세상은 변하고 꾸준한 수요는 없다. 우리의 주식인 쌀도, 사회와 문화가 변함에 따라 점차 팔기가 어려워진다. 그렇게 기본적인 것들도 변하는 세상에, 아주 잠깐 유행했던 대왕 카스텔라나 탕후루는 그 유지 시간이 더없이 짧다. 게다가 나를 갈아 넣어 성공한 첫 번째 성공의 단맛을 보게 되면, 다시 나를 갈아 넣을 용기가 옅어지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어렵다. 그런데 그 편안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사람들은, 꾸준히 그 자리를 유지하며 성공의 길을 걸어간다. 첫 번째 성공에서 조금은 더 도전적인 모습으로 두 번째 성공을 이루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 흐름이 계속적으로 유지가 되면 그것이 그들만의 브랜드가 된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만의 브랜드. 하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수백만 번의 실패와 반성과 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간을 즐길 수 없다면 그 길을 계속적으로 걸어가는 것이 어렵다.
누구에게나 좌절과 실패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것 같은 침체기가 온다. 그 시간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 걸까... 나는 그 힌트를 영화 라라랜드와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보았다.
타인의 인정.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순수한 사랑.
라라랜드의 남자 주인공 세바스찬은, 재즈를 사랑하는 자신과 재즈 따위 관심 없는 청중/고용주에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현실은 최소한의 돈이 필요하다. Unpaid is not romatic. 돈이 없는 현실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 그래서 세바스찬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재즈가 아닌 다른 대중적인 연주를 하면서 생을 유지해 간다. 그러다 청중/고용주 몰래 연주한 재즈 피아노 선율에 여주인공은 홀린 듯 그의 연주를 따라 식당 안에 들어온다. 그렇게 세바스찬에게 자신의 연주를 인정해 주는 한 여인이 나타나게 되고, 그 둘은 사랑에 빠진다. 세바스찬은 힘든 현실 속에서 그녀의 인정으로 버티며 살아간다. 삶은 고되고 힘들지만, 그녀와의 재즈 연주와 음악은 그에게 살아갈 혹은 버텨낼 힘과 용기가 아니었을까. 결국 세바스찬은 대중음악으로 인해 인기와 부를 얻으며 성공한 것 같아 보였다. 재즈는 아니지만 뿌리가 같은 음악이라는 장르 안에서 결국 해냈다. 난 그 원동력이 타인의 인정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대사를 통해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슬럼프 속에서 나희도는 펜싱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녀는 펜싱을 그만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편이 나았다. 스포츠 특성상 타 분야보다 더 이른 성공을 해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아무래도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희도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펜싱에 대한 사랑이다. 나희도는 펜싱 할 때가 즐겁다고 했다. 성장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냥 펜싱 그 자체가 좋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도 실력을 인정해 주지 않아도, 계속 펜싱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인정, 그녀에게는 그녀를 받아준 코치가 있다. 그것이 그녀의 펜싱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은 아니었지만, 나희도가 이어가고자 했던 자신의 펜싱에 대한 사랑을 인정해 준 수동적인 인정이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백이진의 응원. 엄마도 해주지 않은 응원을 해준 그가 있었기에 희도는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항상 지는 것에 익숙해도 일등의 꿈을 꾸는 나희도의 강점을 봐주었던 이진의 응원이 그녀를 앞으로 달려가게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을 통상적으로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내 인생에 레몬이 주어졌을 때, 달콤함을 더해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마법이다.
사랑은 위대하다. 힘들고 고통의 시간에 사랑이 추가되면, 그 긴 터널을 뚫고 나올 힘이 되어 준다. 나에게 그 사랑은 어떤 존재였을까?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하나의 존재는 아니었겠지만, 그때그때 나를 인정해 주던 여러 존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힘이 들 때마다 자꾸 그 사랑을 찾아가게 되는 것 같다. (요즘에는 두딸래미들에게 다가가 응원을 얻는다.)
난 이제 사랑을 받기보다, 주는 존재가 되려 한다. 내 힘들었던 유년시절, 20대에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 내 주변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 단점보다는 장점을 자꾸 인식해 주며 그 사람의 작은 씨앗에서 뚫고 나오는 힘이 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30대가 끝나가는 시점, 나는 40대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세상의 삶에 정답은 없다. 이것이 짧은 인생 내가 살아온 인생의 정답이다. 감정적으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나를 응원해 주는 그게 단 한 명이라도 그 힘에 증폭기를 달아 살자. 그렇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