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문 100답 - 어떻게 설명서 난독증을 해결했어?
지침서는 너무 두꺼워 한 글자도 읽지 못했고, 지침을 설명하는 오디오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프로듀서로 일할 때, 어느 공공기관의 지원 사업설명회에 참여했다. 난 5분도 못 있고 나왔다. 꽉 찬 설명회는 패소공포증을 일으키고, 설명회 자료집은 난독증이 있어 읽지 못했다. 당연히 설명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공서의 자료는 직관적인 근거로 일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서류로 말한다. 서류로 증명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2003. 봉준호 감독)에서 서태윤 형사(김상경 배우)는 행동파 박두만 형사(송강 호)에게 늘 말한다. "모든 것은 서류가 말한다".
그렇다. 관공서는 늘 서류로 말한다. 그래서 제출할 서류들이 많다. 지켜야 할 지침과 가이드라인도 많다. 그런 것들은 지원서류 또는 입찰 제안 서류에 친절히 적어 놓았다. 그러나. 나는 난독증이다. 읽지를 못하겠다. 너무 어렵고 처음 들어보는 서류 이름들이 난무하다.
나는 몇 년 전에 사업설명회 갔다가 난독증이 일어났던 그 회사에 입사했다.
이후, 지침을 내가 만들었다. 굉장히 많이 고쳤다. 예를 들면 프리랜서의 보험금 가입을 가능하게 바꾸고, 예산항목을 업무의 프로세스대로 바꾸었다.
지침서를 사용자 입장으로 천천히 읽어보며 순서와 내용을 바꾸었다. 나 같은 난독증 환자가 읽을 수 있도록 개선하였다.
지원사업을 하다 보니 '윗분'들이 많이 물어보신다. '그거' 어떻게 됐냐 또는 '그 기획서' 내용이 뭐냐... 또는 '그 기획서' 이번에 지원을 했다는 데 제출했냐라고 등등 물어보신다.
그러면 1천여 편 중 한 편을 머릿속 책장에서 꺼내듯이,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을 준비했다. 어떤 내용이고 어떤 콘셉트인지를 1천 여 편을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지금은 기획서 작성법 책을 썼다. 200페이지 된다.
기획서를 작성하고, 입찰할 때 또는 지원할 때 유의할 사항을 작성했다. 200페이지나 된다. 지금은 PDF 파일로 만들어 두었다.
1. 글 쓰는 공부를 다시 했었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다시 학교를 들어갔다. 아주 무서운 지도교수님 덕분에 글을 쓰게 됐다. 연구실에서 내가 가장 모르는 사람 같았지만 어찌어찌 버텼다. 덕분에 겨우 졸업하고 논리적 글쓰기로 '지원사업 설명하던 그 회사'에 입사했다. 입사할 때 본부장은 내게 말씀하셨다.
글이 참 논리적이다. 논술은 제일 잘 써서 합격됐어
한 페이지라도 논리적인 글을 쓰게 되는 데 3년이 걸린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 스스로 하기 힘들었다. 나를 괴롭혔다고 생각한 교수님이 사실, 나의 은인이고 귀인이고 스승이었다.
2. 핵심 내용을 외웠다. 핵심 단어를 찾아가면서 외웠다.
회사생활하면서 힘들었다. 연구보고서나 행정서류도 처음에는 힘들어했다. 어찌어찌 버텼다. 그러다 보니 일들이 눈에 익었다. 또 하다 보니 책임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고, 누군가 물어보면 막힘없이 대답할 준비를 하였다. 큰 줄거리를 읽어보고 핵심 단어, 키워드를 옆에다 메모하고 외웠다. 1천 편의 기획서를 그렇게 외웠다.
물론 그게 1,2년 만에 되는 것은 아니었다. 10년도 넘게 지나가야 한다. 쉬운 것은 없다.
3. 남에게 설명하듯이 구성을 하고, 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내가 아닌 남에게 설명하듯이 차근차근 써내려 갔다. 기획서도 그렇고, 내가 바꾼 지침서도 그렇다. 또 하나 나를 위한 글이 아닌 남을 위한 글이어야 한다. 쓸 때도 마찬가지이고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난독증이 올 것 같은 글도 차근차근 훑어보고 남에게 설명해야지 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금방 된 것은 없다. 오랜 시절이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혼자 잘 나서 된 게 아니라 누군가 많은 사람의 영향과 도움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게 오히려 큰 건가? 그래서 결국 "기획의 예술"이라는 책을 썼다. 출판은 아직 안 했다, PDF로만 유통하도록 만들었다. 조금 더 다듬고 세상에 다시 내보내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