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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음'이라는 존재를 알 때, 삶이 바뀌다.

사실 주제는 상실감에 대한 것이다.

by 덴부와 셜리

어릴 적 죽음이라는 것은 몰랐다.


원래 어린것, 무지함은 잔인하다.


이유는 내가 초등(국민) 학교 때,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가 죽었어도

죽음에 대해 몰랐다. (물론, 신해철은 슬퍼서 병아리에 대해 곡을 썼지만..)


어릴 때, 여름방학이면 절에서 3일 정도 지냈는데,

그때 나는 너무나 심심해서

잠자리를 모두 잡아 실에 매달아 놓았다.

주지 스님에게 혼나도

그땐 그런가 보다 했다.


최근 지난겨울에도 무지해서 잔인한 것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죽음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가 언제인가


난 어릴 때부터 대학시험 보는 그날까지 밤 10시면 잤다. 새벽에 안 깼다.


그런데 초등(국민) 학교 4학년 때,

새벽 4시 반이었다. 기억한다.


엄마의 펑펑 울음소리에 깼다.


외삼촌, 즉 엄마의 오빠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죽음을 잘 몰랐다.

그런데 새벽에 엄마는 전화를 받으며 크게 울며 꺼이꺼이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택시 타고 가셨다.


죽음은 상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내게 어떤 상실감과 우울감, 어려움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상실감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렸고 자는 척했지만,

그 상실감을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잤지만.



상실감은 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나는,

남이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워해주었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잘 살기로 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니

삶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해긴 했다.


이제까지 너무 흥청망청 오만방자하게 살아서... 쩝.



누구나 상실감은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냥 안고 있는 것이지 위로받을 것도 위로할 것도 없다.


아직 춥다.

보고 싶다.


나이 들면 돌아가신 아버지도 생각 안 날 것 같고

시간이 지나면 덴버와 셜리 중 셜리도 생각이 안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전히 상실감을 지니고 산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남에게 상실감을 설명하거나 징징댈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상실감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그뿐이다.


사업이 안되서 돈을 잃어버리고

억울하게 명예를 잃어 버리고

오해해서 친구와 손절하고

사랑해서 연인과 헤어지게 된다.


다 그렇게 산다. 나만 특별히 지닌 감정이 아니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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