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in the purple
다시, 보라
남들이 쉽게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나에게는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좋아하는 색깔도 시종일관 보라색이었다. 2월의 탄생석은 자수정이었고, 나는 그 공교로움을 운명처럼 여겼다. 루비도 에메랄드도 감히 자수정의 영롱함에 비길 수는 없다고 으스댔다. 나는 나의 태생에, 나의 기호에 보석을 갖다 붙여서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물감이든 크레파스든 언제나 보라색이 제일 먼저 닳아 없어졌다. 삼각 지붕도, 살찐 코끼리도, 들에 핀 꽃송이도 몽땅 보라색으로 칠했다. 삼라만상이 보라색을 띠게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재미있을까 상상하며 최대한 많은 것을 보라로 물들였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무지개를 보아도 화룡점정이었다. 빨, 주, 노, 초, 파, 남, 그리고 보. 우리말로 ‘보라’로 뭉뚱그려지는 보라색은, 영어로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붉은 보라는 ‘퍼플’, 푸른 보라는 ‘바이올렛’이라고 했다. 쌍둥이 보라는 또한 연보라의 ‘라일락’과 ‘라벤더’를 낳았다. 보라의 계보는 환상적이라고 할 만했다.
멋스러운 캐릭터는 하나같이 보라색을 가지고 있었다.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지라는 디오니소스의 포도 지팡이. 제다이 마스터 윈두의 광선검. 희대의 악당 조커의 스리피스 슈트. 미래 소년 트랭크스의 가르마 탄 머리칼…
입맛에도 보라가 있었다. 외식하는 날이 돌아오면 나는 감자탕집에 가고 싶었다. 감자탕에 환장해서가 아니었다. 감자탕집 놀이방 옆에 있는 냉장고에 업소용 보라색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어서 그랬다. 밥은 대충 씹어 넘기고 콘 과자에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신나게 핥아먹곤 했다. 최근에는 가지 요리와 블루베리의 맛에 반해 버렸다.
보라에서 태어나 보라를 사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나 자신을 무채색의 울타리 안쪽에 가두어 버렸다. 다채로운 것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아. 나는 회색 인간이잖아. 눈이 부시면 피곤해. 까다롭게 굴지 말자. 무난하게 지내야지.
다시 보라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고개를 든 건 귀인의 덕분. 하나를 먹어도 먹고 싶은 걸 먹고, 하나를 해도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진리의 말씀. 보라를 가까이 두겠다고 각오를 다진다. 보라를 두르고 쉽게 눈에 띌 수 있기를. 야릇한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기를. 이 마음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기를. 보랏빛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