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밤이 있는 한
우리가 울상을 지을 일은 절대로 없어 보였다
빨강에서 초록으로 신호가 바뀌었다. 청회색 원피스와 운동화 차림을 한 네가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나는 손을 흔들었던가. 너를 꽉 안아주었나. 멋쩍은 미소를 지었었나. 항상 너를 떠올리기는 쉽지만, 나를 되감아 보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골목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지난날을 이야기했다. 갖가지 기억이 노점에도 간판에도 노랫말에도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여기서 오들오들 떨면서 집어먹은 떡볶이 진짜 맛있었잖아. 그해 여름이 진짜 유난히 뜨거웠잖아. 지금 나오는 이 노래 내가 진짜 좋아하잖아. 진짜, 진짜, 진짜. 맞아, 맞아, 맞아.
지하로 이어진 계단 끝에 널찍한 바가 드러났다. 싸구려 와인과 싸구려 안주를 시켰다. 술은 아주 쓰거나 아주 달았고, 안주는 아주 짜거나 아주 싱거웠다. 둘만의 술자리가 오랜만이라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는 데 급급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가 너무 가깝긴 했지만 그 역시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나 약간 취한 것 같지.”
네가 웃으며 말했다. 벽에 달려있는 촌스러운 네온사인과 발그레한 볼과 찰랑거리는 붉은 액체의 빛깔이 한데 어우러졌다. 비현실적으로 맘에 드는 분위기였다. 술과 밤이 있는 한 우리가 울상을 지을 일은 절대로 없을 것처럼 보였다.
술잔을 다 비운 다음, 들어왔던 문을 통해 계단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초가을의 시원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머리 위에 있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했다. 그 덕에 저쪽은 많이 밝았고 이쪽은 살짝 어두웠다. 나는 너를 끌어당겨 입 맞추었다. 입과 입 사이에 미묘한 감칠맛이 돌았다. 몸 구석구석이 움찔거렸다.
우리는 틈틈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하고 걸었다. 함께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앞이 울렁거렸다. 술에 취해서였을까, 밤이 깊어서였을까. 우리가 우리로 지내고 있어서였을까. 헷갈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