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어른'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이 글의 내용을 설명하는 영상입니다.
그게 돈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어릴적에 종종 들었던 말입니다.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해야했던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이 약간 푸념하듯 하신 말이었죠.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했고 저를 포함한 3대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꽤 넓은 논과 밭을 가지고 농사를 지으셨고, 그 일을 돕던 아버지는 결혼하고 상경해서 전문 기술자가 되셨습니다. 다행히(?) 70년대에 태어난 나는 ‘당장은’ 돈도 떡도 되지 않을 공부만 해도 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시대의 변화, 그리고 가족의 배려 덕분이었지요. 정작 공부할 때는 ‘이걸 왜 하나’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학습, 그리고 학습력 (이게 더 중요!) 은 현재를 사는데 필수가 되었습니다.
중심이 흔들릴 때, 경험 많은 선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할아버지, 아버지, 선생님, 친구도 채워주지 못하는 지혜의 원천이 있으면 좋겠지요? 인문학을 배우면 300살, 또는 1500살 먹은 선배들의 인생 지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인문학의 필요는 ‘더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더 넓은 세계관, 더 넓은 가치관에서 나옵니다. 그 원천은 인생에서 무언가를 평생 골똘히 생각하고 현장에서 실천한 선배들의 결과물이지요. 인문학을 공부하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인생을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씩 가치관을 세워나갔습니다. 가치관이 세워지니 이전보다는 ‘나 다운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나은 선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세가지 중심축'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중심축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주로 의존하는 세가지 중심축이 있습니다. ‘신학, 철학, 과학’인데요. 삶의 모든 결정을 기도를 통해, 믿음을 통해, 성경 같은 경전을 기반으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신학) 그리고 자기만의 철학을 갖춰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우선으로 결정하는 것이죠.(철학) 그런가 하면 팩트이 기반한, 검증된 것만을 철저하게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험을 하고, 연구 결과를 보고 그에 기반해 결정하는 것이죠.(과학)
더 크게 보면 이 세가지는 인생 전체의 방향성을 정하기도 합니다. 평생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이도 있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으로 자살 폭탄 테러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신학) 니체 같은 사람은 평생을 신체적 질병, 심각한 우울증과 싸우면서도 신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죽음이라는 숙명과 인생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씩~ 웃어주는 위버맨쉬 (초인) 의 정신을 가지려 애썼습니다. (철학) 그리고 인간은 어차피 유전자의 명령에 의해 자손을 낳는 기계에 불과하며, 거기에다가 대세와 유행인 '밈'(meme)에 끌려다니는, 자유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리처드 도킨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알고보면 파동으로 되어 있으며, '나'라는 실체는 없다고 말하는 양자물리학자도 있습니다. (과학) 과연 우리는 어떤 중심축을 따라야 할까요? 현재 당신의 중심축은 어디에 있나요?
그런데 말이죠. 사실은 이 세가지에 중요한 하나가 빠졌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신학, 철학, 과학 따위 다 집어치우고 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도 많습니다. 10억을 주면 무슨짓이든 하겠다는 청소년들의 인터뷰를 보고, 한편으론 '그럴 수도 있겠네..'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싸움의 표면적 이유는 성격차이지만, 들여다보면 경제적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 또한 가치 추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의미있는 일을 하려면 돈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뜻을 가진 이들은 재정적 후원자가 있었기에 뜻을 이룰 수 있었죠. (마르크스에게는 엥겔스가 있었고, 루소에게는 바랑 부인이 있었습니다.) 돈이라는 요소를 추가하면 세가지 중심축에서 공부할 영역이 조금 달라집니다. 뭐랄까.. 좀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럼 잠깐 저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 고2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면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 생활’을 했다고 주위에 말을 하는데요. 어쨌든 그 때의 중심축은 ‘성경 말씀’과 ‘목사님 말씀’이었습니다. 오히려 모태신앙이었던 친구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사는데, 저는 어떻게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보려 애썼습니다. 그래서 모순이 보이면 전도사님이나 부목사님을 붙들고 많은 질문을 했었죠. 하지만 도움이 되는 답은 거의 얻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신앙심이 부족해서일까요?)
30대 초반이 되어 더이상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잠시 커다란 가치관의 공백기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자본주의’가 중심축이었습니다. 20대 후반에 취직을 하고, 그 이후로 경쟁력을 잃지 않으려고 ‘영어로 하는 자기계발 모임’도 하고, 돈 버는 방법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했었습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떨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마음이 꽤나 컸습니다.
그리고 30대 중반에는 코칭을 공부하면서 심리학과 과학(양자물리학)을 동시에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읽은 책들은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팩트다!’하는 식의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 저는 중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즈니스 파트너에게도 '당신을 믿는다'는 식으로 결정권을 넘겨버리곤 했지요. 결과적으로는 나도 파트너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40대가 되어서야 철학을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팩트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되었고, 내가 신봉하던 가치관이 변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치적 관점이 매우 좌파적인 생각에서 중도에 가깝게 변하는 것을 발견하며 스스로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선이라 생각했던 것이 악이 되기도 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다고 펼친 정책이 정확히 그들을 공격하는 경우를 보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 와중에 읽었던 철학 책들은 다양한 관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사실 저에게도 마지막 남은 숙제는 ‘돈’ (자본) 이었습니다. '돈이 돈을 버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에 일단 큰 거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불로소득은 나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지금도 그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네요.) ‘돈을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는 정말 뿌리 깊은 신념이 있었고,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돈’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면서 많은 선입견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경제와 돈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할 수록 내가 '무지에 의한 선입견'이 너무 많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현재 진행형입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는 너무나도 많은 부작용을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 하이에크의 말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국민들이 복지정책에 과하게 의존할 때 사회가 어떻게 나빠지는지를 설명하고 있죠.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해에 저는 ‘인문놀이터’를 시작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딸이 인생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은 선택’을 하는 지혜를 갖기 바랬기 때문입니다. 마침(?) 코로나가 시작된 시점이어서 관심있는 분들과 그 험난한(!) 코시국에 3년 가까이를 매주 모여 인문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 3년의 시간 덕분에 딸아이는 ‘역사’ 과목을 잘하는 편입니다. (적어도 만만하게 아는 영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또 ‘철학편’ 공부를 어려워하기는 했지만, 세상의 원리에 해당되는 기초 지식을 꽤 쌓았습니다. 기초 지식의 틀이 있으니 학교에서의 공부도 조금은 더 효율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이 알고들 계시지만, 명문학교일수록 인문학 즉, 인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엘리트 학생들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어딘가에서 리더의 역할, 부모의 역할,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어른들이 더더욱 해야합니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인문놀이터는 어른들 (또는 어른처럼 공부할 의도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모임으로 진행합니다. 지금을 사는 어른들이야말로 인문학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지리, 역사, 철학, 문학의 순서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지리를 공부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역사가 재밌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총,균,쇠’의 개념을 알면, 유럽이 세계를 지배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지리적 이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를 크게 바꾼 대부분의 전쟁은 지리를 모르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하나만 보더라도, 왜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군침을 흘리는지, 왜 세계 식량 위기 이야기가 나오는지, 크림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물론 역사적 이유, 정치적 이유가 함께 얽혀있습니다만.)
역사를 볼까요? 아시겠지만, 역사는 그냥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닙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시대, 6/25전쟁 등이 그냥 과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 그리고 북중러 vs. 한미일의 상황을 보면 그렇습니다. 6/25가 터졌을 때 패전에 신음하던 일본의 한 정치인은 한국전쟁을 (감히!) ‘신의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일본은 한국의 위기가 일본의 기회임을 당연히 알고 있지 않을까요?
영화 ‘서울의 봄’에 나오죠.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과연 우리는 그들의 성공(?)을 제대로 벌한 것일까요? 혹시 그들의 주장대로 혼란한 정국을 빨리 수습해준 덕분에 국정 공백이 없었음을 감사해야 할까요?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증권맨이었던 윤정학 (유아인) 은 국가의 부도에 베팅해서 엄청난 이익을 챙깁니다. 끝까지 국민을 속인 무능한 정부를 탓할까요? 그 상황을 이용해 먹은? 일부 전문가를 탓할까요? 아니면 그저 경제에 무능했던 개개인을 탓할까요?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은 ‘인생 예제’를 미리 풀어보게 됩니다.
세상이 놀이동산이라고 생각해 볼까요? 그런데 놀이 동산 지도가 없습니다. 다른 곳을 가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그냥 우연히 ‘귀신의 집’에 머무릅니다. 무서운 것이 질색이지만 원래 여기가 그런 곳인가 보다~하며 하루 종일 여기에만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재밌는 것을 타고 싶지만 그저 회전목마만 타고 있습니다. 철학을 모른다는 것은 이와 비슷합니다. 놀이동산이 있다면 어떤 놀이 기구가 있는지 둘러보고, 구경해야겠죠. 그리고 재밌어 보이는 것은 타보구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은 것을 골라 다양하게 즐기면 됩니다. 저의 경우는 ‘종교 - 돈 - 과학 - 철학 - (다시) 돈?’으로 너무 먼 길을 돌았던 것 같습니다. 먼저 지도부터 보면서 쭉~빠르게 돌아봤다면 삶의 가성비도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여담이지만.. 철학이 놀이동산보다 좋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기가 많다고 대기줄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
저는 니체를 읽으면서 내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잘 못했는지, 전도사님, 부목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무엇이 불편했는지를 명확히 알았습니다. (기독교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 내 사고 방식과 신앙관의 문제였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으면서 기독교가 왜 '자본주의' 그리고 부유함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지 또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와 타인의 감정을 읽고 이해하는데 문학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전문학 대신 좋은 영화를, 시를 읽는 대신 좋은 가사의 노래나 랩을 즐겨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유명한 고전문학은 아주 오래된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밀도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가성비가 높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는 ‘주홍글씨’를 읽으며 기독교적 가치와 간음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본성인 ‘성욕’ (리비도) 을 생각했습니다. 또한 ‘테스’를 읽으며 누나나 여동생이 없는 내가 여자의 입장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을지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비곗덩어리’를 읽으면서는 인간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 ‘선입견’이 어떤 차별을 만들어 내는지를 알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내용은 온라인 화이트보드 MIRO에 정리해 놓았습니다. (정리한 내용을 한번 연결해서 짚어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캡처한 이미지의 원본을 보실분들은 이 글 마지막의 '인문놀이터' 참여 링크를 확인하세요.
지난 3년간 인문놀이터를 매주 진행하면서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시간을 들여가면서 공부하고 진행하는거지? 전공자도 아닌 주제에?’
인문학도가 아니지만 저는 세가지는 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 그림, 쉬운 설명, 큐레이션’
다행히 이 세가지는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크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포인트입니다. 저는 얕더라도 일단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잘합니다. (얕아서 문제지만요.) MIRO 보드를 활용해서 큰 그림을 먼저 보고, 확대해서 세부 내용을 보는 접근을 취합니다. ‘쉬운 설명’은 제 눈높이 자체가 높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엮어서 설명을 잘하는 편입니다. 마지막은 큐레이션입니다. 저 자신에게 부족한 전문성을 채워주는 수많은 좋은 자료 (글, 영상) 를 모아두었고, 큰 그림과 연계해서 안내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저는 직업적으로 ‘커뮤니케이션 코치’입니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지 강의와 코칭을 하는 사람입니다. 리더십과 퍼실리테이션에서는 철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홉스를 따른다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막기 위해서는 절대 권력자가 필요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를 따른다면 외부의 적에 맞서 똘똘 뭉치려면 거짓말도 마다하지 않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와 달리 루소를 따른다면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따라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루소의 ‘일반의지’는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악용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요.)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보면 ‘니체, 레빈, 스키너, 루소, 들뢰즈, 칼 융, 에리히 프롬’ 등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매우 낯설기도 한 철학자들의 주장이 어떻게 사회생활에 지혜를 줄 수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회생활, 조직 생활을 하더라도 관점의 넓이가 다른 것이죠. 모임을 통해 이런 좋은 텍스트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기존의 모임과 달리 이번에는 사회생활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일하는 어른들'을 위한 모임입니다. 지리, 역사, 철학, 문학을 하지만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 나만의 중심을 찾아가고 비즈니스와 업무에 도움이 되는 관점을 폭넓게 얻어가는 시간이 되도록 준비할 예정입니다. 정기 모임은 한달에 한번씩 가질 예정이구요. 각 테마별로 비정기 모임을 추가적으로 공지하며 진행할 예정입니다. 기본 바탕이 되는 지식을 먼저 큰그림으로 공부하고, 이후에는 관심 테마별로 스터디도, 토론회도, 워크샵도 진행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에 가입해 놓으시면 공지로 알려 드립니다.
1. 삶의 중심이 잡히지 않는 분 (종교, 철학, 지식, 돈,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까?)
2. 삶의 관점이 너무 고정되어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
3.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좁은 것은 아닌가 고민되는 분
4. 인문학의 필요성을 막연하게는 느끼지만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겠는 분
5. 그래도 '있어빌리티'를 위해 인문학 상식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
6. 비즈니스와 리더십에 인문학이 어떻게 접목되는지 궁금한 분
■ 공지 전용 오픈채팅 링크와 비번입니다. (정기 모임 안내 신청 안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https://open.kakao.com/o/gtrXncyc
비번 : dlsans (인문을 영타로)
오픈채팅의 공지에 MIRO 세부 내용을 볼 수 있는 링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