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를 '한 지역'으로 묶는 건 좀 무례한 일입니다. 한중일이 거기서 거기라고 하면 우리도 화내겠지요? 이 안에 들어 있는 다양성은 유럽 전체에 맞먹습니다. 11개국, 6억 8천만 명, 수백 개의 민족, 수천 개의 언어. 불교 국가, 이슬람 국가, 기독교 국가, 공산주의 국가가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를 펼치면, 이 다양성의 원인이 보입니다. 땅과 바다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하나로 통일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동남아시아는 두 덩어리입니다.
대륙부: 인도차이나 반도(Indochina Peninsula). 이름 자체가 지정학적 위치를 말해줍니다. '인도(Indo)'와 '차이나(China)' 사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이 이 반도 위에 있습니다. 북쪽에서 중국의 영향이 내려오고, 서쪽에서 인도의 영향이 건너왔습니다. 두 문명의 그림자가 겹치는 땅입니다.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한자를 쓰고 유교를 수용했습니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인도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불교 문화가 뿌리내렸습니다. 같은 반도인데 동쪽과 서쪽이 다른 문명권입니다.
한반도로 치면 대륙부 동남아시아는 남해안 뒤쪽의 평야와 산지입니다. 북쪽(중국)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반도를 세로로 갈라놓고, 그 사이사이로 강이 흐르며 저마다 다른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도서부: 말레이 군도(Malay Archipelago). 세계 최대의 군도입니다. (군도는 섬(도)이 무리지어 있다(군)는 뜻이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동티모르, 싱가포르가 이 바다 위에 흩어져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만 17,000개의 섬입니다. 동서 길이가 약 5,100km. 미국 본토의 동서 거리와 비슷합니다. 섬 하나가 나라 하나만큼 큰 경우도 있고, 이름도 없는 산호초인 경우도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이 군도를 '누산타라(Nusantara)'라 부릅니다. '바깥 섬들'이라는 뜻의 자바어입니다. 2024년에 수도 이전 프로젝트의 새 수도 이름으로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말레이 군도'는 외부인이 붙인 이름이고, '누산타라'는 자기 이름입니다. 이름을 되찾으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볼 때마다 새삼 놀라는 것이 있는데요. 과거 일본 제국의 전성기를 보면 정말 깜짝 놀라곤 합니다. 진짜로 아시아를 거의 통째로 삼킨 모습이니까요. 패전하고 나서도 과거를 그리워하며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 지도자들의 행태가 이해되기는 합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과거니까요.)
2편에서 "좁은 것이 넓은 것보다 비싸다"고 했습니다. 말라카 해협(Strait of Malacca)이 그 원리의 극치입니다.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의 좁은 바닷길입니다. 길이 약 800km. 가장 좁은 곳의 폭이 2.8km. 한강 폭의 겨우 세 배 정도입니다. 이 좁은 물길로 세계 해상 무역의 약 40%가 통과합니다. 중동의 석유가 동아시아로 올 때, 중국의 상품이 유럽으로 갈 때, 전부 여기를 지나갑니다.
서울로 치면 말라카 해협은 강변북로의 가장 좁은 구간입니다. 여기가 막히면 서울 전체 교통이 멈추는 병목. 실제로 말라카 해협이 막히면 세계 경제가 흔들립니다. 이 해협을 우회하려면 인도네시아를 빙 돌아야 하는데, 며칠이 추가됩니다. 며칠의 지연이 수조 원의 비용이 됩니다.
역사적으로도 말라카는 항상 핵심이었습니다. 15세기 말라카 왕국(Malacca Sultanate)이 이 해협을 장악하면서 동남아시아 최대의 무역 허브가 됐습니다. 이후 포르투갈(1511년), 네덜란드, 영국이 차례로 이 해협을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세 나라가 해협의 양쪽을 나눠 갖고 있습니다. 싱가포르가 면적 733km²(서울의 약 1.2배)의 작은 도시국가인데도 세계 금융 허브가 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말라카 해협의 끝자락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대륙부의 지형을 보면 왜 이렇게 많은 나라가 생겼는지 이해됩니다. 중국 윈난(雲南)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반도를 세로로 갈라놓습니다. 산줄기 사이로 큰 강들이 남쪽으로 흐릅니다. 이라와디강(Irrawaddy, 미얀마), 짜오프라야강(Chao Phraya, 태국), 메콩강(Mekong, 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 홍강(Red River, 베트남). 각 강의 유역이 하나의 나라가 됐습니다.
메콩강(Mekong River). 동남아시아의 동맥입니다.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서 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6개국을 관통합니다. 길이 4,350km. 한반도 끝에서 끝까지를 네 번 이상 왕복할 수 있는 길이입니다. 이 강이 수천만 명을 먹여 살립니다. 메콩 삼각주(베트남 남부)는 세계 최대의 쌀 수출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강의 상류에서 중국이 댐을 짓고 있습니다. 상류의 수량을 중국이 통제하면, 하류 국가들의 농업과 어업이 직격탄을 맞습니다. 강은 공유자원인데, 수도꼭지는 상류가 쥐고 있습니다. 1편에서 "강은 모은다"고 했는데, 모으면서 동시에 상류와 하류의 권력 비대칭을 만들기도 합니다.
도서부는 더 복잡합니다. 바다가 섬을 흩뿌려놓았습니다. 섬마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종교. 인도네시아 하나만 해도 700개 이상의 언어가 쓰입니다. 이 다양성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놓은 것 자체가 경이적인 정치적 프로젝트입니다. 인도네시아의 국가 모토가 '다양성 속의 통일(Bhinneka Tunggal Ika)'인 건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입니다.
동남아시아의 세계사적 역할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향신료(Spice)입니다. 후추, 정향(Clove), 육두구(Nutmeg), 계피. 지금은 마트 양념 코너에서 몇천 원이면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중세 유럽에서 후추는 같은 무게의 은과 교환됐습니다. 육두구는 금보다 비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냉장고가 없던 시대입니다. 고기가 상합니다. 향신료는 방부제이자 양념이자 약이었습니다. 수요는 폭발적인데 공급처가 지구 반대편입니다. 정향은 오직 말루쿠 제도(Maluku Islands, 과거 이름 향료 제도(Spice Islands), 현재 인도네시아 동부)에서만 자랐습니다. 육두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다 제도(Banda Islands)라는 작은 섬 몇 개에서만 났습니다.
이 향신료를 직접 가져오겠다는 욕망이 대항해 시대를 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에 도착한 것(1498년)도,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한 것(1492년)도,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한 것(1519-1522년)도, 출발점은 같습니다. 후추와 육두구. 세계사를 바꾼 건 금이나 총이 아니라 양념이었습니다. (물론 금과 총도 한몫했지만, 처음 배를 띄운 동기는 양념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반다 제도의 육두구 독점을 위해 영국과 거래를 했습니다. 네덜란드가 반다 제도를 갖고, 대신 영국에 북아메리카의 작은 섬 하나를 넘겼습니다. 그 섬의 이름이 맨해튼(Manhattan)입니다. 1667년의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 당시에는 육두구가 맨해튼보다 가치 있었습니다. 역사는 사후에야 어떤 거래가 좋았는지 알려줍니다.
불의 고리 위의 삶. 도서부 동남아시아는 환태평양 조산대(Ring of Fire) 위에 앉아 있습니다. 2편에서 다뤘던 그 불의 고리입니다. 인도네시아에만 활화산이 약 130개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 폭발이 일상입니다. 2004년 인도양 쓰나미(Tsunami)는 수마트라 서쪽 해저 지진에서 시작됐습니다. 23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화산이 축복이기도 합니다. 화산재 토양은 극도로 비옥합니다. 자바 섬(Java)의 면적은 한반도의 약 60%인데, 인구가 1억 5천만 명입니다.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섬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화산 옆에 사는 이유는 위험해서가 아니라, 화산 덕분에 땅이 비옥해서입니다. 재앙과 풍요가 같은 뿌리라는 건, 2편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보르네오(Borneo) — 세 나라가 나눈 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입니다. (1위 그린란드, 2위 뉴기니.) 이 하나의 섬을 세 나라가 나눠 가졌습니다. 남쪽 대부분이 인도네시아(칼리만탄, Kalimantan), 북쪽 해안에 말레이시아(사바·사라왁, Sabah·Sarawak), 그리고 그 사이에 작은 나라 브루나이(Brunei). 브루나이는 면적이 서울의 약 10배인데, 석유와 천연가스 덕에 1인당 GDP가 세계 최상위권입니다. 작아도 자원이 있으면 다릅니다.
필리핀 — 동남아의 예외. 동남아시아 대부분이 불교·힌두교·이슬람의 영향권인데, 필리핀만 가톨릭 국가입니다. 인구의 약 80%가 가톨릭 신자입니다. 이유는 식민지 역사입니다. 스페인이 300년간 지배하면서 가톨릭을 심었습니다. 이후 미국이 50년간 지배하면서 영어를 심었습니다. 7,6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는 태풍의 길목이기도 합니다. 매년 평균 20개 이상의 태풍이 지나갑니다. 지형과 기후가 만든 이중의 도전입니다.
동남아시아의 핵심은 이겁니다.
사이에 있다는 것, 그리고 흩어져 있다는 것.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문명을 동시에 흡수했습니다. 수만 개의 섬에 흩어져 있어서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해상 무역의 중계자로서 번영했습니다. 말라카 해협이라는 좁은 목을 쥐고, 세계가 오가는 길목에서 통행료를 받았습니다.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했고, 다양했기 때문에 유연했습니다. 유연함이 이 지역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