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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창훈 Mar 12. 2022

권리를 위한 투쟁, 꼭 해야하는 걸까요?

예링 - 권리를 위한 투쟁 

여러분은 다음의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겠습니까?


Case1) 

학교에서 한 친구가 왕따 당하고 있습니다. 왕따 당하는 학생, 침묵하는 다수, 왕따를 주도하는 학생, 각각의 입장이 있습니다. 다음의 생각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해 보세요.   

왕따 당하는 학생은 자신의 법감정과 권리를 실현하지 않으므로 본인의 책임이다.

침묵하는 다수는 이렇게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나으므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침묵하는 것이다.

왕따를 주도 하는 학생은 자신이 원해서 하는 행동이다. 누구도 뭐라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 문제가 없다.


Case2)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단체 집회를 하면서 이를 막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들이 법적 불익과 사회적 지탄을 받을 것을 알면서 까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Case3)

 3.1 만세운동과 무장 독립 투쟁으로 많은 조선 민간인들이 오히려 죽음을 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일본군의 보복)  일본의 지배를 차라리 빨리 인정했다면 억울하게 죽는 사람은 훨씬 더 적어졌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하는 것이 맞을까요? (나의 행위로 다른 사람이 죽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위의 내용은 모두 ‘권리'에 관한 상황입니다. 이런 법적 권리에 관련한 개념을 현실적으로 고민한 대표 인물이 ‘예링'입니다. 그의 저서 ‘권리를 위한 투쟁’은 법을 현실에 적용할 때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링의 생각은 다음의 문장으로 쉽게 압축해 볼 수 있습니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평화를 얻는 수단은 투쟁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무엇일까요? 

역사와 철학을 연구한 사람들마다 각자의 관점을 주장했습니다. 역사의 원동력을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니 생각해 볼만한 문제일 것입니다. 인문놀이터에서 다뤘던 책의 저자들을 중심으로 몇가지 관점을 알아보겠습니다. 

  

헤겔의 ‘절대정신’ - 헤겔은 인간이 현재의 상태(정)에 반대되는 상태(반)가 부딪치고 조화하면서 새로운 상태(합)가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인류는 그렇게 변화, 발전해 왔다는 것이죠. 그 원동력은 ‘절대정신'이라 주장했습니다. 소위 ‘반박불가'의 절대적인 진리의 상태를 향해 간다는 것이었죠. 예전에 불합리했던 노예제, 흑인 차별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 - 헤겔의 수제자라를 자처하던 마르크스는 ‘변증법'에 열광했으나 그 동력이 절대정신이라는 생각은 반대했습니다. 헤겔은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변증법에 적용했습니다. 유물론은 간단히 말에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것, 특히 경제적인 것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해 ‘먹고 사는 것'이죠. 먹고 사는 문제가 구조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분노한 이들이 투쟁을 하면서 사회는 변할거라는 것이죠.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의 영국을 비롯한 국가들은 10대 아이들을 노동에 착취할 정도로 빈부격차와 노동 환경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노동자는 이런 극한의 상황을 견디고만 있지 않을 것이고, 이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깨부수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회계약론 ‘홉스 -로크 - 루소' - 사회계약론은 권력의 독점에서 전체적인 균형을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과거 ‘왕권신수설'이라는 왕의 절대 권력에서 점차 ‘군주정 - 귀족정 - 민주정'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권리’를 위해 싸웠고, 글로 남겨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갔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 대혁명, 미국의 독립전쟁등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홉스는 왕권신수설이라는 왕의 절대적 권한을 부정했지만, 여전히 ‘의회파’가 아닌 ‘왕당파'를 지지했습니다. 한명의 군주가 일관성 있게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좋다고 보았지요. 다만 군주는 국민의 필요에 의해 계약을 맺고 권한을 얻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존 로크는 ‘의회파’를 지지했습니다. 군주가 모든 권한을 갖는 것에 반대했죠. 특히 사유재산제도의 인정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로크 본인이 부유한 시민계급인 ‘젠트리' 계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마음대로 재산을 뺏지 못하게 하려면 ‘의회파'를 지지해야 했습니다. 루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일반 시민의 전반적인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현실적 관점에서 루소는 ‘간접 민주주의'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과 투쟁 -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서양 최초의 역사서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입니다. 역사는 페르시아 (동방 문명)가 그리스 (서양 문명) 를 침략한 사건입니다. 동양의 중국에서는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춘추전국시대'가 있었습니다. 넒은 중국땅에 전국 7웅, 춘추 5패라 불리는 나라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었죠. 이 끔찍하고 불안한 시기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생각을 쥐어짜낸 철학자들의 수많은 생각을 ‘제자백가'라고 합니다. 100개의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할 수 있겠죠.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전쟁중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과 투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다양한 주장중에 저는 크게 세가지를 생각합니다. 경제, 자존심(민족), 권리입니다. 내가 더 잘 살기위해 전쟁을 일으켜 식민지를 만들고자 하고(경제), 작디 작은 땅조각을 지키기 위해 수만명의 군인을 희생시키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권리'라는 것으로 수렴합니다. 경제도 결국 ‘경제권'이라는 권리이고, 민족도 ‘민족자결주의' (우드로 윌슨이 주창했지만 이마저도 선진국의 입장만으로 대변했습니다.) 라는 의사결정의 ‘권리'로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사회를 좋게 만들까요? 

사실 위의 네가지 관점 모두 ‘권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면 인류 대다수는 여전히 절대왕권을 휘두르는 지배자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을까요? 누구나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리는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힘주어 말한 사람이 예링입니다. 예링은 ‘법감정'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법적으로 불이익을 당했을 때 분노하는 것이 ‘법감정'입니다. 이 법감정이 살아있어야만 잘못된 것에 저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혼란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친일파, 종북좌파라는 말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비하할 때 사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집단들은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당연히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각자가 자기의 주장을 하고 상대를 비하하고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들의 ‘권리'라고 볼 수 있을까요? 모두가 그런 식으로 권리를 주장하면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의한 만인의 (법적) 투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미국에는 Ambulance Chaser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큰 수입을 얻지 못하는 변호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사고 현장만 뛰어다니면서 법적 소송을 권유하는 현상이 많아지다 보니 생긴 말이라고 합니다. 상대가 조금의 잘못을 했을 때에도 나의 권리를 주장하며 소송을 하고 ‘권리'를 위해 다투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일까요?  정반대로 왕따를 당해도 그냥 참는 당사자와 침묵하는 다수는 괜찮은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해주는 것이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입니다.


미래사회에 권리를 위한 투쟁이 필요할까요? 

권리에 대한 문제는 미래에 더 첨예하게 대립할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개인의 사생활을 담은 ‘영상 불법 유포' 문제가 있습니다. 범인을 잡고 영상을 삭제해도 이미 퍼진 자료는 없애기 어렵지요. 사이버 공간에서의 범죄 문제도 더 다양해질 것입니다. 메타버스 세상은 또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플랫폼'을 소유한 회사가 절대권력을 가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글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은 엄청난 양의 개인정보를 시시각각 수집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조종하는 AI가 등장할 것이라는 현실적 두려움도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권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편하게 권리를 넘겨주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회원가입을 할 때 계약사항을 전부 따져보고 마음에 안들면 거부해야 할까요?





권리를 위한 투쟁 본문의 일부를 참고하세요.

 당신은 투쟁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평화를 얻는 수단은 투쟁이다. 법이 부당하게 침해되고 있는한 법은 이런 투쟁을 감수해야 한다. 법의 생명은 투쟁이다. 즉 민족과 국가 권력, 계층과 개인의 투쟁이다. 세상의 모든 권리는 투쟁에 의해 쟁취되며, 중요한 모든 법규는 무엇보다도 이런 법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맞서 투쟁함으로서 쟁취된 것이다.

또한 모든 권리는 민족의 권리든 개인의 권리든, 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할 준비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정의의 여신은 한손에는 권리를 재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권리를 관철시키는 검을 쥐고 있다. 저울이 없는 검은 적나라한 폭력에 지나지 않으며, 반대로 검이 없는 저울은 그야말로 무기력한 법일 뿐이다.  법은 끊임없는 노동이다. 더욱이 이것은 국가 권력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요구되는 노동이다.

법의 역사가 보여주는 모든 위대한 업적, 즉 노예제나 농노제의 폐지, 토지소유권의 자유나 영업 혹은 신앙의 자유와 같은 것들은 치열하게 수세기에 걸쳐 계속된 투쟁을 통해 쟁취되었다. 신은 축복을 내리는 민족에게 그 민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거저 주지 않고, 또한 그것을 얻는 수고를 경감해주지도 않으며, 오히려 더 가중시킨다. 이런 의미에서는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법이 탄생하기 위해 요구되는 투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권리를 침해 당했을 때 수고스럽게 주장할 권리보다는 오히려 평화가 더 나은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소송을 좋아하며 또 어떤 사람은 평화를 좋아한다. 권리의 입장에서 볼때 두 사람은 똑같이 정당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법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것인지 혹은 포기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권리자에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생활속에서 종종 접하는 이러한 견해가 권리의 가장 내적인 본질에 배치(반대)되며, 가장 배척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견해가 세상 어딘가에서 일반화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종국에는 권리가 소멸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권리는 스스로의 존립을 위해서는 불법에 대한 용감한 저항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이런한 견해는 불법으로부터 도피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인격 그 자체에 도전하는 굴욕적 불법에 대한 저항, 즉 권리에 대한 경시와 인격적 모욕의 성질을 지니는 형태의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의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다.

법감정은 나무 전체를 지탱하는 뿌리다. 뿌리가 쓸모없게 되거나 말라버리면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줄기나 잎사귀는 눈에 띈다는 장점을 가진다. 부당한 법률이나 나쁜 법 제도들이 국민의 윤리적 정신력 위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은 변변치 못한 수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땅 밑에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런 정치인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화려한 잎사귀 뿐이며, 뿌리에서 잎사귀로 올라가는 독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제 정치는 나무를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일을 해야하는지 알고 있다. 잎사귀는 남겨두지만 뿌리를 파괴한다. 전제 정치는 도처에서 법을 침해하고 개인을 학대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이 작업을 하면 나무는 저절로 넘어지기 때문이다.

민족의 힘은 곧 그들의 법감정의 힘과 같으며, 국민의 법감정에 대한 보호는 국가의 건정성과 힘에 대한 보호와 같다. 민족이 느끼는 부당한 규정 혹은 악의에 찬 제도는 국민의 법감정을 훼손하며, 국민의 힘을 훼손하며, 법이념을 상대로 죄악을 저지르며, 결국 이같은 죄악은 국가 자체에게 역습하여 가끔 이자에 이자를 쳐서 죗값을 비싸게 지불해야만 한다.





인문놀이터는 매주 토요일 저녁 8~10시, 인문학 도서를 소재로 배우고 토론하는 모임입니다. 절반이상은 초중학교 학생과 학부모님이 함께 참여합니다. 자녀와 함께 배우고, 대화하고, 성장하기 원하는 분들은 오픈채팅에 가입하시면 참가방법을 안내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인문놀이터에 참가하실 분을 위한 링크와 비번입니다. 

https://open.kakao.com/o/gtrXncyc  

비번 : 'dlsans' (인문을 영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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