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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Jeong Aug 28. 2020

이모 - 권여선(안녕 주정뱅이)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

아마도 이 이야기의 화자가 이모와의 만남을 어딘가 정리한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나는 두 달 남짓 매주 월요일 오후가 되면 시이모를 만났다. 우리는 묽은 블랙커피를 마셨고 나름대로 공평하고 정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보았고, 그녀의 일상을 들었다. 혼자 살기 시작한 이유와 지금에 삶에 다다르게 한 까닭도 알게 되었다. 시이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나는 정기 휴일인 월요일 빼고는 그녀가 매일 갔다고 했던 도서관에 가 보았다. 그녀를 생각하면 그립다는 생각도 들고 슬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는 역시 지울 수 없었다.


권여선 작가의 <이모>는 남편 태우의 큰이모를 만나러 가는 병원에 가는 장면에서 실질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편의 큰이모, 즉 시이모는 화자의 결혼식조차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건 시이모가 2년 전부터 가족들과 관계를 끊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족 관계이지만 갑자기 병원에 찾아가게 된 이유는 시이모가 췌장암에 걸렸기 때문이고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화자는 애써 묻지 않았다. 화자는, 첫 만남부터 '너구나' 말하는 시이모의 모습에 당황했고, 또 화자가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자 더욱 당황했다. 이 장면, 이 대화가 참 좋았다.


“내 집에 누굴 초대하는 건 처음이야.”

“아, 네.”

“송장 치우게는 안할 테니 놀러 와.”

“네.”

“아이, 오지 마라, 오지 마!”

고양이처럼 토라진 시이모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투정하듯 물었다.

“아니 왜요?”

“난 떨리는데 넌 심드렁하잖니?”

“아니에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요. 갈게요.”

“그래, 가라.”

“아니, 이모님 댁에 놀러 간다고요.”


가족 부양의 의무를 짊어진 맏딸이었던 시이모

그녀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객사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회사를 다니며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했건만 남동생의 빚을 갚아주느라 모아두었던 돈과 회사를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을 건네주었다. 그런 일은 한 번 더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 몰래 남동생 보증을 서 둔 바람에 그녀는 서른아홉에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십 년 가까이 걸려 빚을 다 갚고나자 쉰 살에 가까웠다. 그녀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남동생이 또 도박빚에 몰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죽네 사네 하던 밤 바로 다음 날 편지 한 통을 써 놓고.


그런데,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철도 침목처럼 규칙적으로 살았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살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있더라도 막막한 어둠처럼 아무 의미나 무늬도 없지. 그때 나는 방탕하게 돈을 다 써버리고 얼른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밖에 안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변해서 지금처럼 살게 됐는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밤 이후부터인 것 같구나.”


그녀의 삶을 살았다면, 어쩌면 하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을 할머니라고 부르는 이웃집 여자가 있었다.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고 그래서 온수가 나오지 않아 드라이어로 온수 계량기를 녹이고 있으니 뭐하고 있냐고 묻던 여자였다. 자신이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당신 집 계량기도 아마 얼었을 거라고, 녹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여러 번 설명해줘도 물고기 눈을 하고선 한 번에 이해를 못하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집으로 들어가더니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를 데려나왔다. 이모는 그 남자의 등허리를 노려보다 오싹한 증오를 느낀다.


이모의 젊은 날, 참외씨를 바르며 바라 본 어떤 남자의 등허리가 있었다. 4, 5년쯤 만나다 헤어진 사람이었고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와 헤어진 시기가 남동생의 빚 때문에 저축한 돈과 퇴직금이 날아간 시기였다. 그녀는 그와 헤어졌고, 그 남자는 몇 년 후 어떤 어린 이혼녀와 결혼을 했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이모는 그 남자의 아내와 페북 친구까지 맺었지만 혐오를 느껴 그 길로 페이스북을 끊었다고 했다.

이모가 옆집 남자의 등허리를 보며 느꼈던 증오는 아마도 두 가지가 아니었을까. 저런 물고기 같은 여자도 함께 하는 사람이 있어 계량기 위쪽과 아래쪽을 함께 녹이는데. 그때 남동생이 아니었다면, 그 남자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원래 있어야 할 내 삶은 어디로 갔는가. 사십 대 내내 거울을 통해 봐왔던, 항상 목이 마른 듯 칼칼한 비정규직의 표정을 한 자신의 모습을 집 근처 문화센터 도서관에서 이모는 발견했다.


그녀가 기대감에 가득 차서 돌게장의 껍데기 속에 모아놓은 노르스름한 알과 내장을 입에 넣었을 때였다. / unsplash


자신이 항상 피해자인 줄 알았던 이모. 그러나,

추운 겨울날 오며가며 본 적 있던 노숙자에게 돈을 건네다 그의 오므린 손바닥을 보았는데 잘못 태운 숯가루처럼 얼룩덜룩한 무채색의 어둠이 고여 있었다.

이모가 대학생이었던 시절,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람의 손바닥을 담배로 지진 적이 있었다. 단지 성가시고 귀찮다는 이유였다고 이모는 말했다.


'나는'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심지어 발음도 하지 못하던 때를 눌러서

'나는'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생각했던 이모는 자신의 손바닥 가장 깊은 곳에 담배를 눌러 끈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면 아마 이 순간부터일지 모른다. 그때부터 이모는 필요 없는 건 다 버렸다. 한 달에 35만 원만, 고정 비용을 빼면 하루에 5천 원 정도로만으로 삶을 빼곡하게 채워나갔다. 어쩌면 그렇게 오랫동안 충만하게 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모는 췌장암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거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자신을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이모는 남편인 태우와 나에게 1/3을 상속한다고 지정했다. 하지만,

통장에 입금된 여덟 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 달에 35만 원씩만 쓰면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느껴졌다.


시간을 들여 서로에 대해 알고 가끔 공감해서 함께 웃거나 울기도 한다. 종이가 물에 젖듯 잠시 서로에게 젖을 수는 있지만 그게 영원한 것인가. 이모의 말처럼 그게 피붙이라면, 피붙이의 관계라면 더 깊숙이 엉킬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불가촉한, 서로 닿을 수 없는 존재인 게 아닐까. 그 간극을 좁혀보려고 평생을 노력해보지만 성가시고 또 귀찮아서 그게 영영 안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억울하기도, 억척스럽기도 한 삶의 얼룩과 그걸 전달받은 피붙이가 아닌 제삼자의 회상. 그게 권여선 작가가 보여준 이모가 아닐까.


이 작품은 <안녕 주정뱅이>라는 소설집에 포함된 소설이며, 제목처럼 여기 수록된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술을 마신다. 제목을 보고 또 인물들이 한 잔 걸치는 장면들을 보면 너도 술 한 잔 옆에 놓고 책을 읽으라는 권여선 작가의 교묘한 꼬드김 같은 기분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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