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선가 본 문구.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내면의 깊은 우물로 내려가 바닥에 깔린 돌멩이 하나를 주워 오는 일이라고.
나는 오늘 그 돌멩이 하나를 쥐고, 왜 내가 꾸준히 브런치를 쓰고 스레드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것은 서울 강남 선릉 혼술바 어울림이라는, 작고 기묘한 공간을 운영하는 나의 생존 방식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믿음이라는 이름의 불확실한 재화
바(Bar)라는 공간은 참으로 기묘하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경험해 보기 전에는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신뢰재에 속한다.
문을 열고 들어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위스키 한 잔을 목으로 넘기기 전까지는 그곳이 천국인지 아니면 그저 비싼 설탕물을 파는 곳인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손님 입장에서 바의 문을 여는 건, 마치 내용물을 알 수 없는 통조림을 따는 것과 비슷한 긴장감을 준다.
그래서 사장인 나는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당신을 아주 정중하게 모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가족처럼 모십니다 따위의 문구는 누구나 쓸 수 있다.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이런 말들을 우리는 값싼 말이라 부른다.
슬프게도 고객은 공짜로 내뱉은 말은 믿지 않는다. 마치 지하철역 입구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전단지처럼, 가볍게 손에서 미끄러져 나갈 뿐이다.
서울 강남 선릉 혼술바 어울림의 비싼 신호 보내기
그렇다면 진짜 신뢰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공급자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원칙을 지킬 때 비로소 발생한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를 비용이 따르는 신호라고 명명했다. 꽤 근사한 용어다.
이와 관련해 나에게는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는 나도 인간인지라 쉬고 싶을 때 공지를 올리고 하루 문을 닫곤 했다.
그런데 딱 하루 휴무 공지를 올리고 쉬었던 날, 그 사실을 모르고 찾아왔다가 닫힌 문을 보고 발길을 돌린 손님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손님의 쓸쓸했을 뒷모습을 상상하니,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돌덩이가 얹힌 기분이었다.
그건 매출을 놓친 아쉬움과는 결이 다른, 일종의 부채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냥 주 7일, 매일 문을 열기로 했다.
내가 휴식을 반납하고 가게를 지키는 것. 이것은 나에게 명백한 비용이다. 하지만 손님은 본능적으로 계산을 마친다.
이 사장은 자신의 쉼보다 나의 헛걸음을 더 걱정하는구나. 내가 치르는 이 고단한 비용이, 역설적으로 손님에게는 가장 확실한 진심의 증명서가 되는 셈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불완전함의 연대
이러한 신호가 전달되면 상호성의 원칙이라는 마법이 시작된다.
사장이 이토록 진심(이라 쓰고 체력의 한계라 읽는다)을 보이니, 손님 역시 나도 그에 걸맞은 좋은 손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탁구공을 주고받듯, 마음이 오간다.
더불어 내가 브런치나 스레드에 올리는 구질구질한 고민과 실패담들은 사장과 손님 사이에 심리적 유사성을 형성한다.
완벽해 보이는 바 사장이 아니라, 아, 이 사람도 나처럼 먹고사는 문제로 끙끙 앓는 동시대인이구나라는 동질감. 이런 유대감은 단순한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넘어 끈끈한 팬덤을 만든다.
서로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만큼 빠르게 친해지는 방법은 없으니까.
결국,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러니 내가 오늘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아직 우리 가게의 문을 열지 망설이는 당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초대장이다.
말로만 떠드는 환대보다는, 내가 치르는 비용과 매일 문을 여는 미련함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에게 믿음을 주고 싶은 것이다.
혹시라도 오늘 밤, 고독을 달래 줄 적당한 공간을 찾고 있다면 서울 강남 선릉 혼술바 어울림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이곳에는 꽤 괜찮은 위스키와, 쉬는 날 없이 당신을 기다리는 조금 미련한 사장이 있다. 그것은 갓 내린 커피처럼 꽤 따뜻하고 괜찮은 조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