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선풍기 같은 연애

by 류이음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습하고 덥다. 그게 전부다. 겨울의 공기는 날카로워서 정신이 들지만 여름의 공기는 무겁고 축축해서 생각을 마비시킨다. 나는 그래서 여름이 싫었다.


작년 여름도 그랬다. 숨 막히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렀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더 크게 들렸다. 그때 그 남자를 만났다. 친구의 소개였다. 좋은 사람이야. 한번 만나봐. 그런 식의 가벼운 말이었다. 나는 여름이라서 싫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씨에 누군가를 만나는 건 고역이다. 하지만 거절할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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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는 시내의 한 카페였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도착했다. 그게 나의 습관이다. 그는 정각에 나타났다. 땀을 뻘뻘 흘리는 나와 달리 그는 꽤 뽀송뽀송해 보였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커피를 마셨다. 그는 말이 많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좋다고들 하지만 그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와 몇 번 더 만났다.


우리는 영화를 봤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영화였다. 밥을 먹었다. 특별히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파스타였다. 커피를 마셨다. 그는 언제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나는 따뜻한 라떼를 마셨다. 여름에도. 그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 점이 좋았다.


그는 나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았다. 나도 그의 세계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궤도를 도는 행성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 거리가 주는 안정감이 편안했다.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나 혼자 버티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잊게 해주었다. 그는 지방에서 올라온 나를 신기해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둔다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여름을 싫어하는 내가 여름에 만난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인생은 가끔 그런 식으로 장난을 친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아무렇지 않게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면 무더운 여름의 불쾌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고장 난 선풍기 같은 존재였다. 완벽하게 시원하지는 않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은. 그런 희미한 바람.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연락이 뜸해졌다.


처음에는 바쁜가 보다 생각했다. 협력사와 미팅이 많은 내 일처럼 그에게도 무언가 복잡한 일이 있겠거니 했다. 메시지를 보내면 단답형의 답장이 돌아왔다. 전화를 걸면 받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고 싶지 않았다. 구차해지는 건 싫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끝났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시작도 희미했고 끝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 걸 잠수 이별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단어가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별은 이별이지 잠수까지 할 건 뭔가. 그냥 사라진 것이다.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이상하게도 나는 담담했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다. 그냥 그랬다. 여름이 끝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여름에 시작된 만남이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계절. 그 계절의 유통기한이 다했을 뿐이다.


가을이 왔다. 나는 주말에 집에서 뒹굴거렸다. 다이시댄스의 음악을 들었다. 일을 하고 퇴근길에 맥주 한 캔을 샀다.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부재는 내 일상에 어떤 균열도 만들지 못했다. 그는 내 인생에 잠깐 들른 손님 같았다. 잠시 창문을 열었을 때 불어온 여름밤의 미지근한 바람 같은.


겨울이 되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계절 속에서 살았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 남자는 왜 사라졌을까.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나는 고장 난 선풍기조차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스쳐 지나간 여름 감기 같은 것이었을지도.


상관없었다.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모든 일에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피곤해진다. 나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작년 여름 나에게는 그런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다. 그게 전부다. 마치 작년에 입었던 여름 옷을 옷장 깊숙이 넣어두는 것처럼. 그의 기억도 그렇게 정리했다.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하겠지. 아니면 혼자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 무엇이든 괜찮다. 나는 그저 나의 속도로 나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고장 난 선풍기는 고물상에 팔면 그만이다. 나는 이제 새로운 선풍기를 살 생각이다. 혹은 에어컨을 들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시원한 여름을 맞이할 준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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