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마침표, 맥주

by 류이음

일이 끝났다.


나는 텅 빈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이 희미하게 웅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내 하루의 배경음악 같았다. 특별할 것 없는 멜로디. 반복되는 코드. 나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납처럼 무거웠다.


회사 밖으로 나섰다. 서울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목적지가 불분명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그 흐름에 합류하지 않고 잠시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물론 갈 곳은 정해져 있다. 나의 작은 집. 나 외에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


발걸음은 저절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왜 편의점이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퇴근이라는 N극은 편의점이라는 S극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거의 물리법칙에 가까운 일이었다.


편의점 자동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위잉. 그런 소리였다. 안의 공기는 바깥과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시스템 에어컨이 만든 인공적인 서늘함. 나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점원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잠시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결코 만나지는 않았다. 괜찮았다.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주류 코너의 냉장고 문은 거대한 유리벽 같았다. 그 너머에는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맥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벨기에의 맥주. 독일의 맥주. 일본의 맥주. 그리고 물론 한국의 맥주. 그들은 저마다의 색과 디자인으로 나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오늘은 나를 선택해. 오늘은 나의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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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의 선택은 늘 같았다.


네 캔이라는 경제적인 합의. 그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은색 디자인의 캔. 나는 망설임 없이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인공적인 냉기. 그것은 하나의 약속과 같았다. 곧 너의 하루를 끝내주겠어. 그런 약속.


계산대로 걸어갔다. 점원은 여전히 스마트폰 안에 있었다. 삑. 바코드가 찍히는 소리가 편의점 안을 울렸다. 나는 카드를 내밀었다. 또다시 짧은 기계음이 울렸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시스템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감정 없는 소리들의 연속. 어쩌면 현대인의 삶이란 그런 건지도 모른다.


편의점을 나왔다.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맥주 캔이 작게 덜컹거렸다. 나는 집으로 향했다. 그 몇 백 미터의 거리가 하루 중 가장 솔직해지는 시간이다. 회사에서의 나도 아니고 집에서의 나도 아닌. 오직 맥주 한 캔을 들고 걸어가는 나.


생각해 본다. 나는 왜 맥주를 샀을까. 알코올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다. 나는 술에 약하다. 한 캔이면 충분히 알딸딸해진다. 단지 시원한 음료가 마시고 싶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콜라나 생수를 샀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의 의식일 것이다. 나만의 작은 종교. 하루라는 지루한 미사를 끝내고 마시는 성수 같은 것. 일을 하고 월급을 받고 생활을 유지한다. 그 모든 당연하고도 힘겨운 과정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 나는 이 맥주 한 캔을 마실 자격이 있어. 스스로에게 내리는 작은 허가.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다. 어두운 공간에 불을 켜자 익숙한 나의 세계가 나타났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맥주 캔을 넣지 않았다. 바로 마실 것이니까.


컵도 필요 없다. 캔 뚜껑을 땄다. 치익. 세상에서 가장 경쾌한 소리 중 하나다. 하루의 모든 소음이 그 소리 하나로 압축되는 기분. 나는 차가운 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길게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간다. 식도를 지나 위장에 도착하는 그 여정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는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맞은편 아파트의 불빛들이 보였다. 저 불빛 아래에도 누군가 나처럼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같은 의식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맥주 한 캔은 마침표다. 길고 지루했던 오늘이라는 문장의 끝에 찍는 동그랗고 완벽한 마침표. 내일 또 다른 문장이 시작될 것이다. 괜찮다. 내일의 끝에도 편의점이 있을 테고 맥주가 있을 테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오늘 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