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스마트폰을 뒤집어 놓는 손님이 있다.
앉자마자 화면을 아래로 돌려서 테이블 위에 엎는다. 검은 뒷면만 천장을 향한다. 알림이 사라진다. 카톡도 이메일도 뉴스 속보도. 세상이 보내는 모든 신호가 차단된다. 아무것도 깜빡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재촉하지 않는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예의라고 생각했다. 대화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라고. 그런데 혼자 온 손님도 그렇게 했다. 마주할 사람이 없는데도 폰을 뒤집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저것은 타인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의식이었다.
바깥의 시간을 여기 두겠다는 선언.
그런 손님들 중에 한 사람이 있었다. IT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매일 열두 시간을 일한다고 했다. 그 사람은 폰을 뒤집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갔다. 바에 앉으면 항상 손목시계를 풀었다. 초침까지 맞춰 놓은 시계였다. 버클을 풀고 잔 옆에 나란히 놓았다. 올 때마다 같은 동작이었다. 습관이라기보다 의식에 가까웠다.
바깥에서 시계는 채찍이다. 숫자가 돌아갈 때마다 등을 때린다. 9시 회의. 12시 점심. 2시 보고. 6시 퇴근. 분침이 한 칸 움직일 때마다 인간도 한 칸 움직인다. 시계가 주인이고 사람이 하인이다.
그것을 손목에서 풀어놓는다는 건 해방이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이상했다.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 자체가 요즘은 드물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날로그 시계를 찼다.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디지털 숫자는 시간을 알려주기만 한다. 아날로그 시계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보여준다. 초침이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무언가가 지나가고 있다는 감각. 그 사람은 시간의 무게를 몸으로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벗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한번은 그 사람이 시계를 풀면서 말을 했다. 오늘 하루가 열여섯 시간이었다고. 나는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 아니냐고 물으려다 멈췄다. 그 사람에게 하루는 깨어 있는 시간 전부였고 그중 열여섯 시간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시계를 차고 있는 동안의 시간은 회사의 것이거나 약속의 것이거나 마감의 것이었다. 자기 시간은 없었다. 시계를 풀어놓은 이 순간부터가 진짜 자기 하루의 시작이라는 얼굴이었다.
잔을 내려놓았다. 얼음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첫 모금을 마시지 않았다. 한참을 잔만 들여다봤다.
나는 물었다. 안 마시냐고.
아뇨. 지금 얼음이 녹는 거 보고 있어요.
그 사람은 얼음이 녹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멍하니. 아무런 목적 없이. 각이 진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투명한 물이 술 위로 번지는 과정을. 그 시간 동안 그의 눈은 어떤 숫자도 읽지 않았다. 슬랙 메시지도 일정 알림도 마감 카운트다운도 없었다. 오로지 투명한 것이 더 투명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쉬는 거였다.
세상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반응을 요구한다. 메시지가 오면 답해야 하고 전화가 울리면 받아야 하고 알림이 뜨면 확인해야 한다. 반응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반응하지 않는 자신이 게으른 것 같고 무책임한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다. 그래서 손가락은 쉬지 않는다. 눈도 쉬지 않는다. 뇌도 쉬지 않는다.
얼음이 녹는 것을 바라보는 시간에는 반응할 대상이 없다. 얼음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녹을 뿐이다. 그 앞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자신을 만난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사람이 지치는 이유는 할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기 속도를 잃어버려서라는 것을. 바깥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하고 몇 시까지 끝내야 하고 몇 시까지 보내야 한다. 시간이 사람을 끌고 다닌다. 속도를 선택할 수 없다. 자기 맥박이 아니라 세상의 맥박에 맞춰 뛴다.
심장이 자기 것이 아닌 리듬으로 뛰면 사람은 아프다.
술이 줄어드는 것도 시계라는 생각을 했다. 잔이 가득 찬 상태에서 한 모금씩 줄어가는 것. 그 감소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시침도 분침도 아니다. 마시는 사람의 맥박이다. 빨리 마시면 빨리 줄고 천천히 마시면 천천히 준다. 누구도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시간의 통제권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그 사람을 지켜보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흡이 느려졌다. 들어올 때는 숨이 짧았다. 걸음도 빨랐다. 말도 빨랐다. 그런데 잔이 반쯤 비워질 무렵이면 등이 느슨해졌다. 어깨가 내려갔다.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넓어졌다. 문장이 짧아지는 게 아니라 문장 사이의 침묵이 길어지는 것이었다.
그 침묵이 그 사람 본래의 속도였다.
바깥에서는 침묵이 비효율이다. 회의에서 3초만 말이 없어도 누군가 끼어든다. 엘리베이터에서 5초만 조용해도 폰을 꺼낸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도 그 사이를 채우려 하지 않는다. 비어 있는 시간을 비어 있는 채로 둔다.
빈 시간은 빈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채워지는 시간이다.
한번은 그 사람이 시계를 두고 갔다. 다음 날 연락이 왔다. 시계를 두고 온 것 같다고. 그런데 목소리가 다급하지 않았다. 되찾아야 할 물건이라기보다 잠시 맡겨둔 짐에 가깝다는 투였다. 시간을 맡겨두고 간 사람의 목소리였다.
며칠 뒤에 가지러 왔다. 시계를 건네주면서 나는 말했다. 잘 가고 있더라고. 시계가. 그 사람이 웃었다. 저 없이도요? 나도 웃었다.
시계는 사람 없이도 간다. 사람은 시계 없이도 산다. 다만 바깥에서는 그 사실을 잊고 산다. 시계가 멈추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자기가 멈추는 건 괜찮으면서.
문을 열고 나갈 때 그 사람은 시계를 다시 찼다. 스마트폰을 뒤집어서 화면을 확인했다. 부재중 알림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줄지어 있었을 것이다. 바깥의 시간이 그 사이에도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데 시계를 다시 차는 손목의 움직임이 들어올 때와 달랐다. 느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잠깐이었지만 자기 속도로 숨을 쉬었던 사람의 여유가 손끝에 남아 있었다.
시계가 없는 시간 동안 사라진 것은 시간이 아니었다. 되찾은 것이 있었다. 자기 심장의 박자. 자기 호흡의 깊이. 자기 침묵의 길이.
나는 오늘도 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한다. 이 바의 시계는 얼음이라고. 녹는 속도가 곧 이곳의 시간이라고. 그리고 그 속도 안에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자기 것이었던 리듬을 되찾는다고.
시계를 풀어놓는 순간이 끝나는 시간이 아니다.
비로소 시작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