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섬들 사이로 오가는 한 잔의 연대

by 류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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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섬이라는 생각을 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물에 둘러싸여 있다. 소리를 질러도 파도가 삼킨다. 손을 흔들어도 안개가 가린다. 그래서 대부분은 포기한다. 자기 섬 안에서 불을 피우고 혼자 밥을 짓고 혼자 잠든다.


바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등을 보면 안다. 섬에서 막 건너온 사람의 등이다. 짊어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래 서 있던 사람의 등이다.


늦은 시간이었다. 카운터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전부 혼자 온 사람들이었다. 셋 다 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정하지 않은 말이었다. 카운터 위를 향해 던지는 종류의 말이었다.


회사에서 자기만 빠지고 프로젝트가 돌아간다고 했다. 괜찮은 척하는데 괜찮지 않다고 했다. 필요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잔을 입에 대는 사이사이로 문장이 흘러나왔다.


옆자리 사람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말을 걸진 않았다.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귀는 열려 있었다.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같은 말을 돌려서 반복하고 있었다. 괜찮지 않다는 말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반복이 필요했다. 한 번 말해서 풀리는 것은 감정이 아니다. 여러 번 같은 곳을 문질러야 비로소 얼룩이 옅어진다.


옆자리 사람과 대화가 시작되었다. 긴 대화는 아니었다.


옆자리 사람이 먼저 일어났다. 계산을 했다. 자기 잔과 남자의 잔까지. 나는 금액을 말했고 그 사람은 카드를 내밀었다. 나가면서 남자를 보지 않았다. 서로의 이름을 모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잔 하나가 건너갔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들여다봤다.


이유 없이 남의 술값을 내는 사람.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행위. 이름도 모르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는 사람을 위해 돈을 쓰는 것. 합리적이지 않다. 경제학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런데 인간으로는 설명이 된다.


사람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그렇다. 도움을 줄 방법이 없을 때 사람은 괴롭다.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더 괴롭다. 그 괴로움을 해소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술 한 잔이었던 것이다.


조약돌 하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건너편 섬까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파도에 가라앉을 수도 있다. 그래도 던진다. 던지는 행위 자체가 메시지다. 나는 당신의 바다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현대인은 고립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혼밥을 하고 혼술을 하고 혼영을 한다. 자발적 고립이라고 부른다. 맞다. 선택이다. 그런데 그 선택의 끝에서 사람들은 결국 문을 연다. 누군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완전한 고립을 원했다면 집에 있으면 됐다.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이미 신호다. 나를 봐달라는 신호가 아니다. 나도 누군가의 곁에 있고 싶다는 신호다.


바에 혼자 오는 사람들은 고립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한 거리에서의 연결을 원하는 것이다. 이름을 묻지 않아도 되고 번호를 교환하지 않아도 되는 연결. 의무가 붙지 않는 온기. 끝나도 아쉬울 필요 없는 관계. 그것을 찾아 문을 여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위한 계산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이름을 몰랐다. 사정을 다 듣지도 않았다. 조언을 하지도 않았다. 단지 곁에 있었고 귀를 열었고 계산을 하고 떠났다. 그 사이에 어떤 다리가 놓였다. 보이지 않는 다리. 건너가지 않아도 되는 다리.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다리.


나는 그 뒤로도 비슷한 장면을 몇 번 더 봤다. 말없이 계산대에서 슬쩍 두 잔 값을 내고 나가는 뒷모습. 한 번도 약속한 적 없는 일이 이 카운터 위에서 반복됐다. 규칙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매뉴얼에 없는 행동이 가장 인간다운 행동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름 모를 섬이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섬들이 바다 위에 떠 있다. 각자의 파도를 견디며 각자의 밤을 보낸다. 가끔 조약돌 하나가 물 위를 튀어 날아온다. 누가 던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것을 줍는다. 손에 쥐면 따뜻하다. 누군가의 손이 잠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라는 단어가 너무 크다면 이렇게 바꾸겠다.


잔 하나의 무게. 그것만으로도 섬과 섬 사이에 물결이 생긴다. 그 물결이 닿는 곳에서 누군가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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