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의 나라 온두라스의 카리비안 해안에 위치한 작은 마을 오모아(Omoa)엔 과거 스페인 제국에 의해 지어진 잘 보존된 요새가 있었다. 1756년에 축조하기 시작해서 이십년 정도가 걸렸다 하는데, 요새의 목적은 당시 출몰이 잦았던 카리비안의 해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요새가 다 지어진 다음부턴 해적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데 당시 해적들에게 더 많은 보물들이 쏟아지는 다른 곳들이 생겨 났거나, 아님 바로 이 요새의 등장 때문이었거나, 좌간 요새 완성 이후 해적들이 거의 출몰하지 않는 바람에 요새의 축조 목적이 무색해 졌다고 한다. 목적이 싱겁게 사라져 버린 요새는 중미의 뜨거운 태양 아래 별 사건 없이 자리하고 있다가 영국군들에게 잠시 점령당하기도 하고, 한참을 버려졌다가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다시 버려지기를 거듭하다가 지금은 나같은 관광객들이나 간혹 맞이하는 나른한 유적지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싱거운 역사적 배경과는 다르게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거대한 한그루의 망고 나무 였다. 이 아름다운 나무는 한국의 시골 마을 어귀마다 한두 그루씩 서있던 당산 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마을의 어른들과 그 자손들이 어울려 더운 여름날 부채를 부쳐가며 크고 시원한 그늘아래서 쉬며 놀곤 했던 그 당산나무가 생각난 것이다. 완벽한 원을 그리며 그늘을 제공하고 있던 이 망고 나무는 하지만 한국의 그 아름드리 당산나무들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의 자손들 중 누군가에 의해 어느날 심어졌을 것이고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이 세월에 따라 두터워지고 넓어지면서 그 자손들 역시 풍요롭게 퍼지고 퍼졌을 한국의 당산 나무와는 달리, 이 아름다운 망고나무는 머나먼 이국의 정복자들에 의해 요새화된 같혀진 공간에 심어져 가꿔졌을 것이고 이곳 열대 밀림의 원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닌 정복자 자신들만을 위한 치장이자 휴식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망고나무에게는 그 아래에서 수백년 동안 인간들 간에 벌어졌던 일들이 무슨 상관이었을까. 정복자들이었건, 감옥에 수감되어 정해진 시간에 햇살을 쬐러 나오던 죄수들 이었거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같이 잠시 지나가던 관광객이었거나, 나무는 제가 향유하는 딱 그만큼의 공간을 이용해 이토록 푸르고 울창하게 오늘도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