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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shin Apr 03. 2019

돈강의 봄

life@Don River.Toronto

토론토 광역시를 소박하게 가로질러 바다만큼 너른 온타리오 호수에 다다르는 돈강(Don River)은 마치 고향의 강과 같은 느낌의 곳이다. 사실 한국에서도 어린 시절의 깊숙한 전방 몇 곳을 제외하곤 줄곳 서울에서만 자라난 내게 고향이란 개념은 그저 관념적, 정서적일 뿐이었다. 어느 때는 이은상 님의 '가고파'에서 그려지는 내 고향 남쪽 바다가 고향일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이동원, 박인수가 함께 한 '향수'에서의 아련한 황소가 가는 밭고랑이 고향일 때도 있었고, 또 어떨 때는 양희은의 '아침이슬'에서 그려지는 '저 거친 광야'가 고향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국만리 토론토에서 바이크를 타고 서서히 들어서면 풀향기, 나무 향기 가득히 반겨주는 이곳 돈 강을 고향의 강이라 생각해도 뭐 그리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이곳에서 내 눈길을 항상 독차지하며 뛰노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좀 게걸스러운 어감의 가마우지가 그 주인공이 되겠다.

녀석들의 잠수 실력과 비행 실력은 너무나 대단했는데 마치 다빈치가 말(馬)을 보고 신의 위대함에 놀랐다 하듯이 나 역시 이 녀석들에게 그 이상의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녀석들이 목만 내밀고 유영하는 모습은 신비하기까지 하다.

돈강 위를 저공으로 빠르게 나르는 녀석의 모습을 담아 본 거다. 녀석이 푸른 눈을 가졌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저렇게 큰 몸집으로 마치 우주선처럼 빠르게 날아다닌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사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마우지 들도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 탄생의 지정학적 배경에 따라 어떤 가마우지들은 목에 밧줄이 묶여 사냥한 물고기들을 삼켜 보지도 못한 채 어부의 손에 의해 게워내어 지는 천형에 평생 시달리는 가 하면, 어떤 가마우지들은 저렇게 로켓처럼 당당하게 날아다니며 제 가고 싶은 곳, 제 먹고 싶은 것 다 먹어가면서 자유롭게 살기도 한다.

페레그린 펠컨, 송골매는 언제나 혼자다. 우아함의 댓가는 고독함인가.

돈강에 사는 푸른 머리 해오라기는 내가 강가로 내려가면 자주 눈에 띄곤 했다. 녀석을 처음 봤을 때는 강가에 서있는 모습이 워낙 천연덕스러워 내 가슴이 다 철렁했었는데, 날아가 버릴 까봐 조심조심 나무 뒤에 숨어 사진을 찍곤 했다.

보통은 이렇게 움직임이 적은 평화를 엿보지만 어떤 때는 공존의 치열함을 목격하기도 한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돈 강을 산책하면서 강 주변의 풀들과 야생화들을 보며 걸어가는데 느닷없는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꺼억.. 꺼억.. 그 소리는 계곡 쪽에서 빠르게 이어졌는데, 후다닥 계곡으로 뛰어 내려가니 바로 앞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괴로운 소리를 지르며 날아 도망가고 있었다. 마침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어서, 소위 Point and Shoot을 시도하며 연사 모드의 셔터를 계속 눌렀다. 상황이 수초 만에 종료된 후 사진을 확인해 보니 주먹 만한 텃세 두 마리가 갈매기를 공격하며 쫓아내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갈매기의 등에 올라 발톱으로 잔뜩 녀석을 움겨 쥐고는 부리로 쪼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 역시 무시 무시한 표정으로 갈매기를 바짝 뒤 쫓고 있었던 거다. 그 소리는 결국 갈매기의 비명 소리였고 난 생생한 생존 경쟁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거였다.

한 곳에 고착해 살아가는 풀과 나무들이 피우는 현란한 모양과 색조 그리고 상쾌한 향기의 꽃들을 보면 자연은 그저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고 마치 인간을 위로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기쁨조와 같은 역할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잠시 멈추고 그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관찰하게 되면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금방 깨닫게 된다.

사실, 인간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양태의 삶의 모습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지 모른다. 죽고 죽이고,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태연히 빼앗기도 하고 먹이를 기만하기 위해서나 포식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온갖 위장술과 달콤한 향기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며 생태계의 일부분으로서 생명을 이어간다. 치열함이 아름답다 하면, 아름다운 거다. 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한다는 것이 치열한 것이면 그 또한 아름답다. 내 영역에 침입한 저 괴물을 어떻게든 쫒아 내지 못하면 난 당장 곤란에 빠질 것이니 난 죽기로 지금 싸워야 한다. 공존?난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텃새의 논리다.

정말.. 텃새는 공존을 거부한 것일까?

좁은 의미에서는 그럴 것 같다. 텃새가 자리 잡고 살아오는 이 곳 돈강 어디쯤의 일정 공간에 국한하여서는. 사실 만일 텃새가 저렇게 맹렬하게 공격을 가해도 사납기로 소문난 갈매기를 쫓아내지 못할 경우, 우리는 소위 텃새라 불리는 강하고 작은 로컬 조류들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역에 구애됨 없이 어디나 날아갈 수 있는 튼튼한 날개와 크고도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갈매기와 같은 극성스럽고 게걸스러운 새들만 본다는 건 상상하기 싫다. 생태계의 균형, 즉 공존을 위해서는 강변의 소박한 공간만을 차지하고 사는 저 작은 새들이 악착같이 포식자들을 물리쳐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뜨거운 한낮에 벌어진 생존 경쟁의 현장. 주먹만 한 텃세들의 강단에 놀라면서 동시에 저 덩치에 맥없이 쫓겨 달아나는 갈매기도 우습다. 사진 찍기를 즐겨해 어딜 가도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다 보면 가끔 이러한 운 좋은 사진을 담을 때가 있다. 이런 장면은 잠복을 하며 기다린다고 포착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빛 좋은 어느 날, 이 작은 곤충들을 언제나 통상적 거리에서만 봐 오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잔뜩 굽히거나 무릎을 꿇고서, 또 자주 호흡을 멈추고서는 마치 내 몸의 크기가 그들과 비슷한 크기로 축소되어 버린 것처럼 아주 가까이서 이들의 눈높이로 이들과 주변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된다. 즉 효율적인 날개와 심플한 다관절을 가진 이 아름다운 피조물과 함께하는 큰 즐거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엔 여러 종류의 꽃 향기와 싱그러운 풀잎 향기와 함께 이 작은 곤충들의 가늘게 붕붕거리는 날갯짓 소리로 가득했었다.

우리의 인생..?

어떤 인생은 멀리 서는 별 매력적인 것 같지 않지만 들여다볼수록 소박하지만 행복한 향기로 가득한 인생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화려하고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 가정사나 그 개인의 면면을 볼라치면 형편없는 수준의 성숙도를 가지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겨우 꾸려가는 경우도 본다. 자연은 속을 들여다볼수록 그 정교함에 감탄하게 되는데 반해 인간이 이루는 사회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소위 복마전의 양상을 띄는 경우가 잦은 것 같다. 微視, 巨視의  스케일을 떠나 자연이 가지는 조화스러움은 그 생태계의 dimension에 적절히 부합되게끔 또 다른 세계가 계속해서 치열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방식을 가진다. 개별 구성원들이 타고난 생태적 역할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전체적 시스템은 지속적으로 잘 돌아가게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거대한 글래디에이터를 보는 듯했지만 정작 녀석이 하는 일은 향기롭고 달콤한 꿀물을 마시는 거였다. 검은 광이 번쩍번쩍 나는 헬멧 같은 녀석의 검은 머리에서 하얗게 이글거리는 타원의 흰빛은 바로 태양이다. 와우...!

얼마나 아름다운 소우주를 형성하고 있는지.. 매일, 매시간 쏟아져 나오는 인간 세상의 악다구니들을 보고 듣고 읽다가도 문득 이들의 세상을 생각하면 우리의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하는 생각에, 잠시라도 위로가 된다. 동시에 그저 제 역할대로 살아가는 이들 생명체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해 오기도 한다. 전 지구적인 차원의 생태계 파괴에 대한 불안과 공포스러움은 고사하고서라도 언제라도 제초제를 물에 타 분무기로 뿌려 한순간에 이들 곤충과 식물을 멸절시켜 버릴 수 있는 우리 인간들 바로 앞에 이들이 살아간다는 사실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생물의 가장 맏형 역할을 하며 이들을 보호하며 공존의 길을 모색하기는커녕 수많은 종들을 멸종의 길로 걷게 하면서 이젠 말라가는 씨들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더 적게 먹고 더 빨리 자라는 거대한 황소와 거대한 연어, 거대한 호박과 알이 수배나 많이 열리는 옥수수를 생산해 낸다.

과일이나 꽃에서 꿀을 빠는 이 이름 모를 fly의 날개와 그물눈 머리통 역시 아주 특별했다. 과일 파리를 유혹하는 나팔꽃 같은 야생화의 멋진 모양과 우아한 색상의 배합과 패턴은 종족의 수정을 가능케 하여 널리 씨를 퍼지게 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곤충을 유혹하는 목적으로만 보기엔 너무 아름답고 정교하다.


어느 해 봄 난 돈강의 어딘가를 자전거로 지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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