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는 이제 시작인걸

@westview golf.aurora

by Peter Shin Toronto

숲엔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사이좋게 공존한다.

가을 나무들이 머무는 따사로운 빛과 실루엣이 좋다. 토론토에서 북쪽 404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오로라 (Aurora)라고 하는 어여쁜 이름의 마을이 나오는데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서는 간혹 오로라(Northern Light)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이곳의 그리 높지 않은 구릉지대 위에 웨스트뷰(Westview)라는 골프장이 있어서 가을이 올 때면 내가 가장 선호하는 컨트리클럽이 된다.

가을을 머금은 투명한 낙엽들과 함께 물이 고인 잔디 위 작은 웅덩이에 낙엽이 떨어져 있는 모습은 정말 예쁘다. 만일 내가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골프 슈즈가 젖을까 봐 불평을 했을 것이다. 어이쿠 웬 물이야! 막 생겨난 내이츄럴 해저드 군. 젠장.. 하며 돌아 걸어갈 뿐이었을 거다.

높이 치솟아 올랐던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그린 위에 반구면 함몰 자국을 형성하며 떨어졌는데 거대한 질량 덩어리에 의해 시공이 휘어지는 자리를 보여주는 것 같다. 파3 홀이었던 이곳에서 공은 백스핀이 절묘하게 걸려 앞뒤로 구르지 못하고 그린에 그냥 꽂혀 버렸다. 스핀이 전혀 걸리지 않았다면 관성에 의해 공은 접지 후 앞으로 굴렀을 텐데 관성과 스핀의 역학이 절묘하게 상쇄된 거다. 피식 웃음이 났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내리 갈긴 볼은 훼어웨이를 벗어나 언덕 쪽으로 올랐고, 난 그 공을 찾으러 이 곳 언덕을 오르는 순간, 오 마이.. 나무 두 그루 사이에 위치한 아직은 덜 물든 포실 포실한 단풍나무, 너무 이뻤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만일 골프라는 이 운동을 아주 잘해서 매번 또박또박 제대로 친다면 내가 볼 수 있는 색은 잔디 색인 초록 밖에 없을 것이다. 내공이 언제나 fairway 나 putting green 에만 떨어진다면 난 주변을 즐길 여유가 없게 되는데, 중심을 벗어나 좌우로 마구 날아다니는 내 공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맬 수 있는 난 행복한 거다. 공을 제대로 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유쾌한 변명이다.

들입다 후려갈긴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갈 때 나오는 표정이 바로 이런 거다. 어의 상실, 골퍼로서의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 아~악! (머릴 쥐어뜯으며) 하지만 바로 이때가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어디로 떨어졌을지 모르는 공을 찾아 나무 밑으로 숲으로 헤매다 보면 아름다운 단풍들을 만나고 이름 모를 들풀도 만나고, 열심히 벌레를 찾고 있는 딱따구리 녀석이 바로 눈앞에 딱따기며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모습은 Rolling Hills 라는 곳에서 동반한 친구에게 카메라를 쥐어주고 찍게 한 것인데 이날 따라 제대로 맞은 공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7,000 야드에 달하는 꽤 긴 코스를 자랑하긴 하지만 그리 경관이 빼어난 곳이 아니라서 공도 제대로 못 치고, 그렇다고 멋진 장면을 담을 곳도 별로 없어서 제대로 스트레스가 싸였었다. 인생도 그런 거 아닌가. 뭐가 좋으면 뭐가 안되고 보통은 어느 정도의 발란스가 이루어지지만 일이 안 풀릴 때는 계속해서 안 풀릴 때가 있는 거다. 그런 상태에서는 열심히 교훈을 배워야 하는 수밖에. 실력을 더 키워야 돼, 더 겸허해야 돼, tolerance level을 높여 조절하자 등등.. 휴.

언제 벼락을 맞았는지 늠름한 기상을 뽐냈을 것이 분명한 곧고 높은 나무는 이제 단 하나의 줄기만 남았다. 하지만 그 작은 줄기에 가득 맺은 잎사귀들 역시 가을을 한껏 맞이하며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너무나 깨끗한 비가 좀 내린 후 fairway 옆 나무 아래 저지대에는 예쁜 물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신통한 건 내 볼이 이곳저곳 좌우에 산재한 상쾌하고 이쁜 곳으로 날 이끌어 주지 않는 다면, 난 그저 타수나 세면서 퍼팅 그린만 바라보며 진군하고 있을 재미없는 심각하기만 한 골퍼가 될 뿐이다. 그런데 솔직히 공도 어느 정도 적당히는 맞아 줘야지 너무 안 맞는 날은 사진이고 뭐고 짜증이 제대로 날 때도 있다. 공이 안 맞는 날은 정말 골프채를 부러뜨려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딱 한번, 한국의 휘닉스 파크에서 offsite로 회의 겸 위크샵을 마치고 팀워크 빌딩으로 나선 라운딩이었다. 자욱한 안갯속에 가랑비까지 계속 부슬거렸는데 어찌나 안 맞는지 스틸 샤프트인 클럽을 부러뜨리려 시도까지 했었는데 내 무릎이 부러질 뻔했다.

나무들의 종류와 키, 그리고 햇살이 스며드는 시간대에 따라 단풍의 물들어가는 정도가 다른 것도 참 좋다. 아직 싱그러운 연녹색 잎들과 황금색, 주황색 단풍들 그리고 타들어 가는 듯한 빨간 단풍이 어우러져 가는 거다. 물에 비친 파란 가을 하늘에 떠가는 구름들은 어떨 때는 실제 하늘에서의 모습보다 더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물끄러미 응시하다 보면 壯子 의 나비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꿈같은 인생, 내가 봐왔던, 내가 믿었던, 내가 도전하고 추구해 왔던 가치들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 내가 본 세상, 내가 먹고 마셨던 음식들,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 내가 배웠던 학문들,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그러한 실상들이 혹 허상들은 아니었을까. 색즉시공의 화두에 잠시 머물게 되기도 한다.

가을의 부드러운 햇살이 아득히 내려앉아 있는 퍼팅 그린을 멀리서 바라보며 걷는다. 어떤 카펫보다 부드러운 촉감으로 내 걸음을 내딛게 해 주는 촉촉한 잔디 길은 한 잎 한 잎, 뭔가 내게 소곤거리는 것 같기도.. 그럴 때면 조용히 슈즈를 벗어 들고 맨발로 이 비단길을 걷기도 한다.

푸르렀던 모든 잎들을 다 떨어뜨리고선 겨울을 맞이하며 늠름히 서있는 고목을 보면 경외심마저 든다. tiny tiny 한 씨앗에서 움터 한해 한해 사계절의 햇살과 풍파를 제대로 견뎌내며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나이테를 늘려간다. 이변이 없는 한 이러한 지극히 친생태적인 나무의 생명 프로세스는 십 년, 백 년, 천년을 넘어, 인간에게 주어진 시한을 훨씬 뛰어넘어 계속해서 진행되면서 자신들의 주변을 어슬렁 거렸던 수많은 인간들의 기억을 가져간다.

어느 가을날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던 하늘 아래서의 단풍은 말을 잊게 한다. 햇살이 관통하는 황금색 단풍잎의 색을 보면 거의 유사한 느낌의 색이 생각났다. 그것은 대학 시절 어두 컴컴한 반 지하 호프 집에서 작은 공기 먼지들을 브라우니안 운동을 시키며 늠름하게 뚫고 들어오던 한 줄기 빛.. 그 빛이 맥주잔을 통과할 때 빛나던 생맥주 황금색.. 바로 그것이었다. 난 당시, 그 500원짜리 OB 베어 생맥주 예찬을 늘어놓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 젊음의 색이다! 고 외마디로 소리치고는 벌컥벌컥 들이키곤 했었다. 호주머니 속에서 돈 대신 학생증을 맡겨가며.

이제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낙엽은 이윽고 大地 의 색과 향이 나온다. 빛과 그림자는 서로 보완적일 뿐 아니라 서로의 대비를 극대화시켜 각자의 가치를 명확히 한다. 비옥한 대지의 기운과 강렬한 태양의 에너지를 조합하여 공간이 허락하는 한 가득 잎을 피웠던 나무들이 이제 그 왕성했던 삶의 흔적들을 흩트러뜨리며 또 다른 형태의 자양분으로 어머니 자연으로 되돌리고 있다.

언제부턴가 한해 한해 계절을 보내면서 가는 세월이 아쉬워지기 시작했을 때였을 것이다. 사철 절기에 맞게 옷을 갈아입으며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서서 끝없이 성숙해 가는 나무들을 보며 몹시 부러웠을 때가.. 하지만, 정말 다양한 종류의 인간 정글에서 벗어나 이제 내 인생의 파티는 겨우 시작되고 있는 것일 진대 나무만 부러워할 것이 무에 있을까.


show must g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