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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Feb 27. 2018

31. 집밥의 정의


"오랜만에 집밥 먹으니까 좋다!" 집에서 저녁을 먹다 말고 아내가 말했다. "우리 엊그제도 친구 집에서 닭도리탕 먹었잖아." 라고 나는 답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은 '우리집' 밥이 아니기 때문에 집밥이라고 할 수 없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남의 집밥도 집밥이 맞는가에서 시작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럼 도대체 집밥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아내에게 묻지는 않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집밥인 듯한 음식을 먹으면서. 


마트에 가서 두부와 애호박을 사 와서 뚝배기에 담아 된장찌개를 끓였다면, 이것은 당연히 훌륭한 집밥이다. 하지만 예상 외로 이걸 과연 집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애매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면 이것은 집밥일까. 양념이 된 갈비를 마트에서 사 와서 구워 먹었다면 이것도 집밥이라 할 수 있을까. 할머니댁에서 얻어 온 곰국은 또 어떤가. 이런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는 "이야 역시 집밥이 최고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먼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밥을 짓는 과정(여기서 밥은 단순히 쌀밥이 아니고 끼니를 이루는 음식을 의미한다)을 살펴보아야 한다.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한 끼니를 먹기 위해서는 보통 1) 구매, 2) 조리, 3) 차림 의 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1)'구매'는 이미 조리된 음식이 아니라 식재료가 되는 날 것 그대로의 상태를 구입하는 것을 말한다. 2)'조리'는 다시 두 가지 과정을 거치는데, 식재료를 다듬거나 양념을 추가하는 '손질'의 단계와 온도를 높여 음식을 익히는 '가열'의 단계가 있다. 손질과 가열 두 가지 과정을 모두 수행했을 때 조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3)'차림'은 조리를 했던 용기에서 음식을 꺼내 다른 용기로 옮기는 과정으로, 다진 파와 같은 첨가물(?)을 곁들이는 과정 전체를 포함한다. 


나는 구매, 조리, 차림 세 단계 중에 적어도 '두 가지'를 손수 만족시켰을 때 비로소 집밥이 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싶다 (뭐야 왜 이렇게 제 멋대로야 라고 말씀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아까 말한 애매한 음식이 집밥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 라면: 엄격하게 말하면 라면의 원재료는 밀가루니깐 라면을 사는 것은 식재료 '구매'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라면을 밀가루에서 직접 뽑는 사람은 없으므로 (있으려나) 일단 식재료 구매라는 첫번째 조건은 충족이 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 온 라면을 그대로 냄비에 끓인 다음, 옮겨 담지도 않고 냄비에 담긴 채로 먹었다면 라면은 집밥이 될 수 없다. 가열은 했지만 손질의 과정이 없었으므로 '조리' 했다고 보기 힘들고, 새로운 그릇에 옮겨 담는 '차림'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라면이 집밥이 되려면 적어도 콩나물을 넣어 조리를 하거나, 국그릇에 옮겨담는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 


- 양념갈비: 이미 양념이 된 고기를 사 온 경우, 원재료를 구매했다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 양념갈비가 집밥이 되려면 '조리'와 '차림'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가령 양념갈비를 후라이팬에 굽기만 하고 그릇에 담아 낸 경우 집밥이라 보기 힘들다. 하지만 대파를 썰어 넣는다든가 다진 마늘을 양념에 추가해서 구우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파채를 함께 담아 낸다면 좀더 집밥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 할머니 곰국: 집밥을 '우리집'밥으로 한정시켜서 생각한다면, 곰국을 만들기까지 할머니의 공로는 구매, 조리의 과정을 모두 거쳤다고 하더라도 무효가 된다. 태생적으로 '구매'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는 할머니 곰국은 여간해서 (우리)집밥이 되기가 힘들다. 조리 과정에서 사리 면이라도 풀어 넣어 데우고, 상차림을 할 때 다진 파와 다대기 정도는 함께 준비해야 재고의 여지가 있다. 직접 담근 깍두기를 곁들여 낸다면 집밥이 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다.


한국 음식이 아닌 음식도 같은 집밥의 조건을 적용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답은 예스다. 당신이 케일을 사와서 발사믹식초를 뿌려 샐러드 볼에 담아 낸 경우, 이것은 '구매'와 '차림'의 조건을 만족시키므로 집밥이 된다. 이거 너무 쉬운거 아닙니까 불공평 합니다 라고 항의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집밥을 먹고 싶다는 아내의 요청에 샐러드만을 내놓는다면...아무래도 좀 곤란해질 것 같다.


당신이 먹은 저녁이 집밥인지 아닌지가 뭐 그리 중요한 문제냐고 따진다면 별로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음식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집밥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아도 되는지 고민하는 당신에게 이 글이 가이드 라인이 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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