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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의 Konadian Life Feb 29. 2020

이민!

이민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 첫 번째 넋두리

이민!



나에게는 이민이란 말이 그리 낯설지 않았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아버지 형제분들의 이민을 가까이에서 보았던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민을 하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친척들의 이민을 무관심하게 생각했었고, 학창 시절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혼한 후에 아이들을 낳고 나서도 작은아버지와 고모들 그리고 여러 명의 사촌들이 미국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지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나이대에서의 80년대 대학생활에서는 흔하지 않았던 것이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이었지만, 당시 욕심을 내서라도 마음먹고 짧은 기간이라도 친척 방문이나 인사를 빙자한 여행이라도 다녀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시면서 박봉에 나의 대학 등록금도 대출로 마련해주신 부모님께 감히 '해외'라는 말조차도 꺼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주변 친구들과 어울려 놀 생각만 했던 것 같고 제대 후에는 취업준비에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다른 생각을 못했으니 이제사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고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대학원을 다니면서 일상으로 생각했던 직장과 사회를 보는 시각이 다르게 변했다. 직장이라는 것은 대동소이하게 생각할 수 있는 조직생활을 통해서 나의 비전을 넓히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대학원에서 접했던 몇 권의 책을 통해내가 가지고 있던 사고의 관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변화를 하지 않는다면 도태된다는 내용의 책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은 조직 내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개인의 역량에 대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일 텐데, 나의 생각은 단순히 조직 내에서의 나의 위치나 직무에 대한 개선이나 발전을 향하지 않고 조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른 방법의 삶을 생각하는 외적요소로 향하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것 이상으로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당시 재직 중이던  회사에서 두 차례의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스스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IMF를 마주했던 1990년대 말 당시 재직 중인 회사는 나름대로 특별한 시장 상황을 바탕으로 탄탄대로였지만, 주변의 분위기에 맞추는 듯한 구조조정이라는 종업원 정리를 시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사팀장이었던 나는 부서장들과의 수많은 회의를 통해 정리될 인원을 선별하고 또 선별해야 했다.
그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회사를 떠나게 된 직원들의 눈초리 이상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나는 두 차례 구조조정 후 세 번째 계획을 수립하라는 윗선의 지시를 뒤로하고 2002년 12월에 미련 없이 그 자리를 털고 조직생활을 마무리했다. 물론 가깝게 지내던 입사동기들과 동료들 또한 떠나려 하는 나를 나무라기도 하고 다독여 주기도 했지만 모든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친 조직생활과 삶 속에서 얻었던 나만의 경험적 가치관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 이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아내의 찬성이 10년 넘게 이어왔던 회사라는 생활의 바탕이었던 조직을 떠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모두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직장을 떠나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도 늘 아이들의 교육에 신경이 쓰였다. 초등학교에서도 부모들의 평생 숙제인 영어 과외를 해야 하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학원을 밤늦게까지 시곗바늘처럼 돌아야 하고, 고등학교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가깝게 지내던 몇몇 사람들이 이민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고 짬짬이 지인들과 함께 아이들 유학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더 크게는 해외 이민도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서  해외에 거주하는 지인들과 소통하면서 정보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교육에 앞서 아내와 나는 갑작스러운 형님의 교통사고로 장남을 잃은 부모님을 모셔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면서 외국에서 아이들을 교육시켜볼까 하는 생각을 접고, 한동안 지인들과 이민 박람회니 유학설명회니 하는 거창한 이벤트를 찾아다니는 것도 포기했다. 그러던 중 부모님께서 미국에 이민을 가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실 기회가 있어 삼사 개월여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무르고 오신 다음 지나가는 말로 "우리 손주들이 그런 곳에서 학교를 다니면 참 좋을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 내 귀에 꽂힌 것이다. 그래! 이거다.

우리 가족의 캐나다 이민은 가장인 나의 결정으로 다소 무식하게 진행을 한 케이스라서 이곳에서 지내며 알게 된 지인들에게도 "나는 맨땅에 헤딩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워킹비자를 손에 쥐게 된 아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 교육은 단기간이라도 외국에서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큰아이가 6학년에 올라간 2008년  3월에 개학을 하자마자 다니던 초등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2학년이었던 둘째도 덩달아 집에서 놀게 했다. 곧 캐나다로 이주할 계획이 세워졌던 탓이다. 더불어 잘 나가던 사업을 접을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맡기고 왕래를 하면서 사업체를 운영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서도 과감하게 매도를 결정하고 온 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것으로 결정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나에게는 가족의 단절이라고 생각되었고, 가족과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을 차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단순함이 나를 그렇게 온 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길로 진행하도록 이끌었다. 다 잘된 것이니 이제라도 잘한 결정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던 10년이 지난 이민생활이지만 글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차츰 조금씩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가면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캐나다에서 처음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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