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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Jun 12. 2024

내 안에 너 없다

너는 너, 나는 나




“서른 넘었는데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부모에게 의존하며 사는 캥거루족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기사다. 캥거루족이란 ‘만 25세를 기준으로 학교 졸업 후에도 취업 여부와 상관없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세대’를 말한다. 성인남녀 10명 중 6명이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뒤로하고 부모에게 의지하며 산다 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캥거루족의 증가는 만혼이나 비혼주의, 경제적 자립의 부재와 맞물려 30대에서 크게 증가하고 있다.




     

캥거루족의 부모는 마처세대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지만,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의미다. 은퇴 후에도 성인 자녀를 돌보고 80~90대 노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베이비부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들의 자식 지원은 몇 살까지가 적당할까? 부모의 금전적인 지원을 전체 응답자의(47.4%)가 대학 졸업 때까지라고 응답했다. 캥거루족이 많은 20~30대는 대학 졸업 때까지(37.8%) 취업할 때까지(23.6%) 독립할 때까지(15.0%) 순이다. 자녀 뒷바라지에 올인하느라 정작 본인들의 노후는 준비도 못한 마처세대는 '언제까지 성인 자녀를 뒷바라지해야 하나?'하는 의문을 품을 것이다.




     

‘지원받을 땐 한국식, 봉양할 땐 미국식?’이란 기사도 접했다. 글에 언급된 중년의 여인은 교육 비용은 한국식으로 넉넉하게 지원받고 대학을 마친 후 미국식으로 부모를 '나 몰라라' 외면하는 아들이 얄밉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버려진 것 같은 소외감과 우울감에 인근 정신병원을 다닌다는 소식도 전했다.자식을 키워본 부모라면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예전과 달리 한두 명의 자녀에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제적 지원을 쏟아붓다 하루아침에 외면당하는 신세. 날벼락 수준의 충격은 쓰나미급이다. 어쩌면 현실 부모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시대적 가치관이 빠르게 변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부각되면서 부모자식 관계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희생, 부양의 관계에서 각자도생, 자립의 관계로 그 의미가 재편성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네 부모는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서라도 내 것을 내어주고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것이 행복이라 여긴다. 내 노후는 아랑곳 않고 자녀의 대학교육에 결혼비용, 그것도 모자라 살집까지 마련해 주는 열렬한 부모도 있다. 여유가 있다면  서로에게 매우 좋을 일이다. 자식은  비빌 언덕이 있어 사는 것이 수월할 것이고  부모는 고생 안 할 자식 생각에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다만 노후 대비가 안된 상태에서 남들 눈치 보아 가며 남들 따라 가며 무리하게 지원하는 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나이들 수록 돈은 풍족하게 써야 궁색하지 않고 건강하게 행복한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 자식에게 재산 물려줄 생각으로 돈은 써보지도 못하고 우울한 노년을 맞이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수명이 짧을 때 허용되었던 통념들이 늘어난 인생길이 만큼 보조를 맞춰 따라오지 못하니 천만다행이다. 캥거루족이 하루빨리 자립하고, 마처세대가 부모에게 마지막까지 효도하고 사랑스러운 자녀와 행복을 누리는 첫 세대이길 바라본다.








자식이란 단어는 온기와 애증을 머금고 있다. 유독 가깝지만 조금만 방심해도 밑바닥까지 서운함을 들어낼 수 있는 관계.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고 많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속마음을 드러내기가 어지간히 쑥스러운 사이. 가장 익숙하면서 낯선,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가장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애증의 사이. 서로 걱정하며 더욱더 냉정해질 수 있는, 그럼에도 가장 가깝고 가장 먼 이름이 가족이고 자식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하는 삶이기에 서로 기대기도, 서운해하기도,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며 미운 정 고운 정 켜켜이 쌓아 올리는 게  부모자식 간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어느새 자식과 나를 분리하지 못하고 의지하며 종속당하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너, 너는 나"로 아이들을 품에서 옭아매니 불협화음은 끊이질 않았다. 부모라는 존재로부터 놓아주는 것이 중요한 의무인데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도망가는 아이와 잡으려는 나 사이에 자존감은 바닥을, 서운한 감정은 우울증까지 소환해 내는 독한 경험을 했다. 서로 눈치만 보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다 격해지면 돌이킬 수 없는 막말을 하며 관계를 비틀어 버렸다. 구멍 난 가슴이 보이기 시작하자 자식으로부터 정신적 독립과 완전한 해방이 최선책임을 깨달았다. 부모의 종속물이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 자녀를 바라보니 마음 비우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내가 행복하니 아이들 마음도  행복을 추가시켰다. 자식을 타인처럼 생각하고 자립하는 길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시원한 인생길임을 이제야 실감한다.





적당히 선을 긋는 연습과 거절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서로의 상처를 최소하하고 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나만의 연막전술이다. “너는 너, 나는 나”  타인이라 생각하니 객관적인 시각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고 분쟁도 확연이 줄어들었다. 희생하고 기대하고 실망하며 내 안에 꾹꾹 눌러 담았던 보상심리까지 들춰내니 마음밭은 늘 억새풀을 연상시켰다. 억울하고 미워하고 서운하기에 앞서 거절로 마음의 소리를 전하는 것이 서로를 위한 단단한 어른으로 자라매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세바시에 나온 정신과 양재웅 원장도 건강한 가족관계를 위한 ‘거절하는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느덧 권리보다 책임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 든 부모, 성인 자녀, 나의 노후 등 내 어깨에 매달린 것들을 잘 챙기며 보듬으며 가야 할 나이다. 가족들의 기대에 부흥하려 애썼던 지난 시절, 많은 부분을 자식을 위해, 자식만을 생각하며 발버둥 쳤지만 행복도 잠시 아쉬움과 허전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이제야 모든 것이 나의 태도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오랜 시간 인생 길이에 맞춰 성인자녀와 함께 해야 한다. 갈수록 의지해야 하는 순간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독립적인 태도로 단단히 홀로 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평생 목줄에 매여 살던 짐승은 줄이 풀려도 멀리 달아나지 못한다.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다. 자식에게 얽매인 포승줄에서 자유로이 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자녀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최선의 관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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