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결혼하기 전 5년을 만났다. 그때 나는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했는데, 그중 하나는 남편이 군대에 있던 16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남편이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을 대비해서 발이 시릴까 봐 일명 '발열 깔창'을 사러 돌아다닌 것이다. 훈련에 전에 배송이 되지 않을까 봐 초조한 나머지 나는 직접 가게를 찾아 나섰다. 발열깔창을 팔던 사무실은 생각보다 너무 멀고 외진 곳에 있었고 나는 추운 날씨에 많이도 걸었다. (별로 효과는 없었다고 한다...) 지금 돌아보면 정말 피곤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향한 설레는 느낌이나 그 사람에 대한 열정적인 애정 표현보다는,
물론 그런 것도 좋기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마음,
그 사람의 삶을 조금 더 좋게, 조금 더 신나게, 조금 덜 힘들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도적인 결심이다.
- <결혼학개론>, p.64
그때는 그랬다. 그 사람의 삶을 낫게 만들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결혼 12년 차이고 아이가 셋이고 각자 일을 하다 보니 서로의 삶을 위해 나를 내던지기(?)에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이런 변화를 <결혼학개론>의 저자 벨린다 루스콤은 익숙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익숙함은 처음 연애 감정만큼 흥분되고 설레는 감정은 아니다. 솔직히 나는 16년 전처럼 신발 깔창을 사러 돌아다닐 열정은 없다.
익숙함 때문이다. 익숙함은 로켓 부스터가 타 없어지듯, 새로 시작된 관계에서 느껴지는 흥분과 설렘이 사라지고 상대로 인해 놀랄 일이 거의 없는 안정 궤도에 진입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익숙함은 모든 결혼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이며, 발에 잘 맞게 길든 신발처럼 여러 면에서 훌륭한 장점이 될 수 있다... (중략) 하지만 이 감정은 잘 다뤄지지 않으면, 두 사람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단순히 지루함과 불만족을 넘어 훨씬 어둡고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결혼학개론>, p.27-28
하지만 그런 열정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와 한 편이 되어 남편을 지원할 것이다. 남편은 조깅을 하는 나를 위해 장갑이나 핸드폰을 넣을 주머니를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전에' 사다 준다. 우리는 서로 어떤 부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줄 알게 되었고,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열정에서 익숙함으로 형태가 바뀌지만 나는 이 익숙함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지난 16년 동안 크고 작은 산을 수없이 넘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일도, 눈물로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고 진지하게 이혼을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 산들을 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치열한 시간을 통해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고 익숙함을 즐기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궁금해졌다. 나와 남편은 길을 멀리 돌아왔지만, 내가 느낀 감정의 소용돌이와 교훈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이 될 수 있을까?
벨린다 루스콤의 <결혼학개론>은 우리가 겪은 지극히 사소하고 또 거대한 문제들이 우리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책에는 수많은 커플들의 사례와 연구를 통해서 부부관계를 개선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다. 사실 여기에 소개된 대부분의 의사소통 방법(잘 싸우는 방법, 피드백 주는 방법, 미안하다고 말하는 방법 등)은 회사에서도 가족과 친구 사이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공감했던 핵심 세 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지금 아무리 좋게 생각하는 것도(혹은 아주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거기서 얻는 만족감(혹은 불만족)은 줄어든다. 즉 행복감은 쉽게 희석된다. 인간은 비교적 안정된 수준으로 삶에 대한 만족도를 유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만족도는 일시적으로 낮아지거나 높아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의 원래 수준으로 돌아온다. 가령 사고가 나거나, 실직했을 때, 혹은 얼굴에 보기 싫게 여드름이 났을 때, 삶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질 수 있다. 반대로 복권에 당첨되거나, 운 좋게 주차 자리를 찾았을 때, 사고 싶은 옷을 세일 가격에 샀을 때, 만족도가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만족이나 불만족은 얼마 안 가 원래 수준을 회복한다.
-<결혼학개론>, p.65-66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은 진실이다. 고통스러운 사건이 난데없이 생기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원망할 사람을 찾고 때로는 복수심에 불타오른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나를 집어삼키기 마련이다. 결국 이 모든 감정들이 언젠가 원래 수준으로 회복될 거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기간을 더 단축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시간들 속에서 나를 자책하지 말고 명상이나 운동을 통해 마음 챙김을 통해 내 감정을 돌봐야 한다. 반대로, 감정이 희석된다는 것을 이해하면 열망하던 일이 이루어져도 이후로 쭉 행복할 거라는 착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한 가지 일에 과도하게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나는 차에서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싸운 적이 있었다. 남편이 운전하는 중 차가 너무 막히자 내가 "여기는 4차선으로 가야지."라고 했더니 남편이 발끈한 것이다. 나는 4차선이 빠르다는 정보를 주려고 한 것이었지만 남편은 4차선으로 가지 않은 본인을 비난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가적인 문제는 운전할 때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목소리를 옆이나 뒤에서 듣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내가 몰랐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도와 다르게 남편이 화를 내자 왜 화를 내냐며 반응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냉전으로 이어졌다. 사실 이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뇌의 방어기제는 위험을 인지하는 순간 싸우거나 도망가려는 반사적인 대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었다.
원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고 싶다면, 내가 상대방에게 말할 때 '당신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먼저 운을 떼고 이야기를 이어간다면 상대방의 보호막을 일단 해제할 수 있다. 문제가 상대방이 아니라 상황에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이 동의해야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 이건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상대방이 말할 때, 나를 비난하거나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전제를 깔고 들어 보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혹시 정말 화를 내는 것 같다면 "나한테 화내는 건 아니지?"라고 직접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 아주 특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방은 나를 해칠 의도가 없다고 생각해보자.
방어적인 태도는 말 그대로 상대방의 말이나 질문을 공격으로 받아들일 때 나오는 반응인데, 이유가 어쨌든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쉽다. 방어적 태도를 취하면 죄책감, 불만, 수치심, 적대감, 혹은 단순히 피곤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니, 배우자의 모든 말에 부정적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방어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방어 모드를 취하게 된다. 그렇게 이런 태도가 습관이 되면 상처 받지 않으려는 생각에만 몰입해 배우자가 하는 말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위험을 막아주는 보호막이 아예 그것에 다가가기 어렵게 하듯이 말이다. 내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은 배우자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말할 때, 내 반응이 ‘그 사람 탓’이라는 식으로 말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결혼학개론>, p.92-93
우리가 진화해온 방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살아남는 것이고 하나는 새로운 정체성과 이해력, 각종 능력을 발전시켜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더 오랫동안 더 잘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에서 갖는 동기 중 하나는 자신을 확장하는 것, 즉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죠. 그 방법 중 한 가지가 바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결혼학개론>, p.53
김경일 교수님은 [책을 읽어드립니다] 걸리버 여행기 편에서, 인간의 죽지 않고 싶은 욕망을 불로와 불사로 나누어서 설명해 주셨다. 간단하게 말하면 인정 욕구와 관계 욕구 때문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인정받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원초적인 욕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우리는 행복을 돈이나 성장과 연결하고 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그 자체에 있다.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주목한다면 지금 무엇을 하는지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것을 깨달으면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던 순간들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함'을 잘못 바라보면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소재처럼 부부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적이 될 수도 있다. 익숙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거나, 상대방이 나를 잘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함은 권태기나 지루함과 동일한 말이 아니다. 익숙함은 주어지는 결과로써가 아니라 매일의 치열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고 믿는다. 치열한 과정이란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설득하고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상대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하는 것이 해결의 열쇠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익숙함을 쟁취하면 무관심이 아니라 친밀함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탄탄한 감정은 모든 자신감의 뿌리가 된다.
글로 읽는 것이 현실에서 부딪히며 얻는 경험과 비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의 솔직한 이야기와 연구 사례들은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남편은 내 추천으로 이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었는데, 어쨌든 이런 노력들이 더 좋은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데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을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내가 먼저 바뀌면 상대방은 내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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