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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 Feb 21. 2021

미야자키에게서 배우는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법

어린 시절 주목받던 천재들은 어느 순간 관심을 잃고 사라져 간다. 반면 그중 극소수는 살아남아 세계적인 거장이 된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들을 많은 사람들이 분석한다. 타고난 천재성, 재능, 끈기와 인내, 수많은 시도와 연결, 운의 요소 등... 성공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을 통해 '미야자키 세계'를 구축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경우 특별한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심리적 깊이다.


뛰어난 그림 실력과 끈질긴 인내는 미야자키의 중요한 무기지만
이 두 가지만으로는 위대한 애니메이터가 될 수 없다.
그를 뛰어난 애니메이터이자 감독으로 만든 건 심리적 깊이다. 

- <미야자키 월드>, p.53


그의 심리적 깊이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나는 세상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심과 공감 능력, 그리고 성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올해 80세가 된 그는 어린 시절, 2차 세계 대전을 경험했다. 군수 물자(비행기 '제로센'의 부품)를 납품했던 가족 사업 덕분에 미야자키 가족은 전쟁 중에도 부유하게 살았는데, 그때 느꼈던 죄책감, 전쟁이 끝난 후 느낀 무력감, 정부에 대한 분노의 감정 등 직접적인 경험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절망적인 사건들에 대한 비판과 체념의 감정들, 지진과 쓰나미 등의 자연 재해에 대한 공포와 경외심, 기술 발전에 대한 놀라움 등... 인간의 감정을 치열하게 파헤치고 성찰하며 깨달은 메시지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비유와 상징을 통해 고스란히 표현된 것이다. 특히 미야자키 세계관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문제에서 벗어나 '인간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이고, 인류는 수많은 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공존할 방법은 없는지' 등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추상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철학적으로 파고든 덕분이다. 


훌륭한 혁신가는 전형적으로
매우 크게 생각하고 또 매우 작게 생각한다.

-<신호와 소음>


저자 수전 네이피어는 미야자키 세계의 중요한 주제를 "인내와 견딤, 수용"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세 가지 중에서도 수용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인내와 견딤도 고통과 두려움을 수용하는 것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수용하라는 걸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1) 고통을 수용하라
2) 나를 수용하라
3) 타인을 수용하라

 


1) 고통을 수용하라

미야자키는 트라우마가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있는 그대로 소중히 간직할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변했을 수도 있다."...(중략) 미야자키는 트라우마보다는 인내의 미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상처를 지울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다. 견디는 수밖에 없다. 치유할 방법은 없다." 그는 감정의 상처가 "인간 존재의 기본 요소"이므로 "그저 감내해야"한다고 말한다. (p.35)


많은 사람들이 고통은 인생에서 '해로운 것 혹은 나쁜 것'으로 고통이 있는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고통은 삶에 당연히 동반되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그저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나 상처를 감내해야 할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 모든 삶은 고통을 동반한다.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외지인으로서 치러야 하는 희생, 힘겨운 노동, 자기 규율, 외부 사건에 대한 반응 등은 인생의 한 과정이며 당연히 동반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즐거움과 웃음은 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한센병 환자가 "삶은 고통이지. 세상은 저주받았어."라고 말한 뒤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다."라고 하는 대사는 그가 한센병 환자 요양소에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그들이 긍정적으로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는 어떤 역경이 닥쳐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설득한다. 인간의 삶이란 모든 것이 불확실의 연속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일이나 사랑을 통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다.


2) 나를 수용하라

죄의식을 여러 차례 언급하던 미야자키는 돌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죄의식은 나 자신, 일본에 있는 내 가족 그리고 세계 속의 일본과 아시아에서의 일본 안에 계속 존재해온 주제입니다."...(중략) "나이가 들고 나서 어릴 때를 비롯한 모든 기억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파낸 기억을 다시 배열해보니 '아, 내가 이렇게 만들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의식이 내 기억들을 칭칭 감았어요. 그런 죄의식을 잃는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걸 잃을 것 같습니다. 나를 정말 지탱하는 건 죄의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중략) 분열된 자아를 받아들이는 일은 내 숙명입니다."(p. 267)


수전 네이피어는 미야자키를 모순 덩어리라고 설명한다. 전쟁을 혐오하고 맹렬하게 반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기술의 영광을 그린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분노하여 인생의 가장 영광스러웠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 그는 기술의 위험성을 깊이 걱정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다면성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싶어 하는 인간에게는 모순으로 보일지언정, 삶은 모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모순적인 모습뿐 아니라 자신의 죄의식까지 작품 속에서 포용한다.


<미래소년 코난>에서 주인공인 라나와 코난은 사슬에 묶인 채로 사막에 버려진 다이스 선장을 만난다. 두 아이는 사슬을 풀어주지만 그들을 구하러 온 구조기에는 다이스 선장이 탈 자리가 없다. 조종사는 자리가 없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밧줄을 비행기에 매달아 다이스를 구한다. 이 장면은 1945년 폭격으로 인해 미야자키 가족이 자동차를 타고 급하게 피난을 갈 때 부모님이 태워주기를 거부한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현실과 영화 속에서 "자리가 없어"라는 현실은 동일하지만, 어린 시절 도와주지 못했던 무기력했던 자신에 대한 트라우마를 드러내며 작품 속에서 극복한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나온다. 하늘을 나는 능력을 잃어버린 키키에게 우르슬라는 자신도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예술가의 고비'로 괴로워했다며, 그럴 때는 낮잠을 자거나 산책이나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고비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일 것이다. 이렇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두려움을 유연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법을 보여주며 미야자키는 마음 편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려준다.


3) 타인을 수용하라

미야자키 세계에서 다른 존재에 대한 열린 마음과 이해는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것, 다시 말해 우리 문화와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회복시켜준다. 그런 부분들은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가 올바른 시각을 되찾는다면 키 큰 풀 사이로 빛나는 도토리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p.219)


미야자키 작품들에서 놀랐던 것은 나와 너,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나를 저주해서 할머니로 만든 마녀를 너무 쉽게 포용하고 돌보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수전 네이피어는 적이었던 그를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은 주인공 소피의 성숙함과 연민을 상징할 뿐 아니라 힘없는 노인 세대에 대한 관용과 애정의 본보기라고 말한다. 이렇게 다른 존재에 대한 열린 시각을 가지는 것은 미야자키 월드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는 황무지에서 홀로 있다가 거대한 곤충을 만나는데 총으로 쏘는 대신 곤충의 눈을 응시하고 곤충 역시 그와 눈을 맞춘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우르슬라가 까마귀와 교감한다. 다음 <모노노케 히메>의 주인공은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 상대방에게 오히려 묻는다. 숲과 마을이 함께 살 수는 없냐고. 너와 나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라고. 


<모노노케 히메> (1997)

미야자키 작품의 핵심 메시지인 '수용'의 관점을 고통/나/타인으로 나누어 보았지만 결국 하나로 정리하면 거대한 세계의 다면성을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한 미야자키의 결론은 세계의 다면성을 이해하는 것이고, 다름을 수용하는 것이 곧 미야자키의 세계관이다. 다면성을 이해하면 선과 악/ 옳고 그름/ 우리 편과 적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시야를 더 넓게 볼 수 있다. 이해와 수용을 통한 사랑, 인내, 열린 마음은 싸움이 아니라 유대감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수용을 통해 결국 미야자키가 말하는 것은 한 가지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가 저주받은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이다. <모노노케 히메>가 제시하는 두 가지 해결책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산에게 아시타카가 한 말 "살아!"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이 메시지는 사람들이 허무에 빠져있던 1990년대 미야자키가 절실하게 매달린 신념이다. (p. 325)
한편 만화의 궁극적인 메시지인 “살아야 한다.”는 미야자키 자신의 메시지다. 짧지만 아주 강렬하다. 전작들에서는 간접적으로 전달했던 이 메시지는 “살아!”라는 캐치프레이즈의 〈모노노케 히메〉에서 더욱 분명해지고 최근작 〈바람이 분다〉에서는 주인공 지로가 폴 발레리의 시를 읊는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p.306)
<바람이 분다> (2013)
<모노노케 히메> (2003)


<미야자키 월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과 그의 작품을 시간 순으로 분석하며 어떻게 '미야자키 세계'가 구축되었는지 설명하는 책이다. 미국인인 저자가 미야자키 작품에 영감이 되었던 곳들을 직접 가보고 그의 작품으로 강의를 하고 이렇게 책을 쓰게 된 것도 그의 세계관과 메시지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야자키의 작품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을 구별하지 못하던 이 책에 언급된 대부분의 애니메이션(<루팡 3세> 빼고 전부)을 몰아서 시청했고 감동과 존경심으로 책을 덮으며 '미야자키 월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열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의 비전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어떻게 각각의 작품이 만들어졌고 세계관이 형성되었는지 일생을 통해 알아보고 이해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미야자키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에 더 관심을 가지고 내 속에 소용돌이 치는 감정과 생각들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미치듯이 열심히, 치열하게 산 삶과 작품을 통해 우리 삶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미야자키 감독과, 그 모든 자료들을 취합해서 긴 호흡으로 나에게 미야자키의 세계관을 심도 있게 전달해준 수전 네이피어에게 감사한다. 또 클릭 하나로 모든 작품을 쉽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해 준 넷플릭스도 감사하다.


#미야자키하야오 #미야자키월드 #미야자키세계 #씽큐온8기 #큐블리케이션


*본 콘텐츠는 로크미디어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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