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이 열풍이던 90년대, 하이텔 외에 내가 빠져있었던 것이 있었다. 무려 850만 부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이우혁 작가의 판타지 소설, <퇴마록>이다. 한국의 정의로운 4명의 퇴마사가 세상의 악령을 물리치는 이야기였는데, 너무 흥미진진했다.
친숙한 구판 인쇄본의 <퇴마록> 시리즈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에서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말세 편에서 서교주와의 혈전 직전, 주인공인 현암이 "강한 힘은 또 다른 강한 악을 부를 뿐이라며" 초월적인 능력을 포기한 부분이다. 중대한 싸움을 앞두고 더 강해질 기회를 포기하다니?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능력(힘)을 포기하는 클리셰는 종종 등장한다. 판타지의 경우 마법적인 힘이 될 것이고, 현실적 세계관에서는 자신의 권력이나 지위를 버리는 것도 해당될 수 있다. 보통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곤 하는데, 이럴 경우 놀라운 결정을 내린 주인공은 더욱 정당성을 얻고 남다른 차원의 인물로 더 부각된다.
그런데 문득 이 초월적인 능력을 포기하는 클리셰가 (주인공을 더 멋져 보이게 하는 장치가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정말 그래야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강해지면 상대방은 더 강해지고, 내가 힘을 포기하면 상대방도 더 강해질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논리인데, 나는 이 힘의 균형을 <모기>라는 역사책에서 찾았다.
우리가 가진 최강의 무기를 생물학적으로 측방 공격하는 데
성공한 모기와 질병들은 다시 한번 기세를 되찾고,
세계의 지배자로 복귀했다.
-<모기>, 티모시 C. 와인가드
"모기와 질병은 늘 적자생존을 계속해왔다" (출처: <모기>, p. 597)
책 <모기>는 인류 역사를 지배했던 질병 '말라리아'와 인간의 싸움을 자세히 그린다. 사실상 정당한 싸움이라기보다는 몇 천년 간 인간이 일방적으로 당해왔다고 하는 것이 맞다. 모기와의 싸움에서 인간이 쉽게 이길 것 같지만 그 반대다. 말라리아를 심각한 병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나에게는 충격적인 사실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모기 매개 질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앞선 세대들과 달리 말라리아 세계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모든 것이 모기 때문이었다.
'모기들에 시달리다 결국 파멸에 이르렀다', '말라리아 기생충 때문에 수천 명의 십자군이 세상을 떠났다', '지역 토착 원주민들은 거의 멸절에 가까운 수준으로 몰살당했다'... 역사적으로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모기들 때문에 판도가 뒤집혔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시작된 것도 모기 때문이었다. 대륙을 발견한 이후 토착 원주민들과 유럽인들 모두가 말라리아로 인해 죽어 나갔고, 아프리카 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시작된 열대열말라리아에 맞서 유전자 변이가 나타났기 때문에 제국주의 유럽인들에게는 아주 좋은 대체 노동력이 되어 준 것이다. 이 유전자 변이는 인간이 말라리아에 보인 가장 빠른 첫 번째 대응이었다.
1. 인간이 모기에 대응한 첫 번째 반격: 유전적 변형(겸상적혈구의 출현)
겸상적혈구의 출현은 약 8천 년 전, 아프리카의 반투족 농부들은 농경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곤히 잠자고 있던 흡혈귀 같은 열대열말라리아를 깨워버린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도 이로부터 단 700여 년 만에 곧장 진화적 맞대응에 나섰다. 헤모글로빈에 무작위로 돌연변이가 나타나 적혈구가 초승달 모양을 띄게 된 것이다.
이 유전적 변형 때문에 말라리아에 잘 버티는 아프리카 인들이 노예무역으로 팔려나가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2. 모기에 대응한 두 번째 반격 : 말라리아 억제제, 퀴닌의 발견
최초로 인간이 말라리아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 페루에서 발견한 "퀴닌" 덕분이었다. 말라리아 기생충의 헤모글로빈 물질대사를 차단하는 퀴닌의 발견은 그야말로 목숨을 살리는 위대한 발견이었다. <모기>의 저자 와인가드는 퀴닌이 구세계와 신세계가 만나면서 낳은 전례 없는 조합의 대표주자라고 묘사한다.
출처: <모기>, p.248
퀴닌은 발견 이후 역사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영국의 크롬웰은 말라리아 매개 모기로 인해 생을 마감했는데, 주치의들이 퀴닌 분말을 복용하라고 애원했으나, 퀴닌을 발견한 이들이 가톨릭 예수회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단호히 거부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퀴닌은 미국 남북전쟁에서도 승리를 이끄는 주역이었다. 하지만 퀴닌은 억제제였을 뿐 치료약은 아니었다.
퀴닌 비축량이 많았던 북부 연방은 이를 무기 삼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출처: <모기>, p.496)
3. 모기에 대응한 세 번째 반격 : 말라리아를 옮긴 범인, 모기의 정체를 밝히다
수백만 년 동안 말라리아로 인해 고통받던 시기를 지나 1877년-1897년 약 20년 동안 드디어 말라리아를 전염시킨 범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러 의사들의 가설과 연구와 깨달음의 순간을 통해 밝혀졌는데, 이때의 주역 세 명은 '1897년 발견 트리오'라고도 불린다.(로널드 로스, 지오바니 바티스타 그라시, 로베르토 코흐) 이중 두 명은 노벨상을 받았고, 이후 프랑스의 찰스 라브랑이 말라리아의 병원체를 발견한 공로로 말라리아와 연관된 세 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참, 이 발견에서 밝혀졌지만 모든 모기가 말라리아를 매개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기들 중에서도 범인은 얼룩날개 모기와 숲모기였다)
얼룩날개 모기 (참고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말라리아 발생률 1위 국가다)
4. 모기에 대응한 네 번째 반격 : 구체적 전략들
드디어 모기의 정체가 밝혀졌으니 이제 효율적으로 싸울 차례다. 1) 퀴닌을 공급하기 위해 키나나무 플랜테이션이 세계 각지를 확대되고, 2) 미국을 비롯해 모기가 들끓는 국가와 식민지들에서 모기 관리 위원회가 창립되었다. UN은 말라리아 위원회를 설치했고, 록펠러 재단은 1950년까지 모기 퇴치와 말라리아 및 황열병 연구를 위해 1억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3) 습지를 개간했고 3) 창문에 모기장을 설치했고 4) 위생을 개선하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고 5) 퀴닌 배급소를 곳곳에 설치했다. 하지만 모두 예방책이었을 뿐이다.
5. 모기에 대응한 다섯 번째 반격 : DDT의 발견과 사용
실질적으로 모기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된 건 1874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화학자들이 처음 합성한 물질, DDT 덕분이었다. 이 살충 효과를 처음 알아본 것은 1939년 뮐러 박사 덕분이었다. 이 공로로 그는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상적인 접촉성 살충제'를 만들기 위해 350번째 시도 끝에 결국 우리가 가진 최강의 무기, DDT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DDT는 화학 모기 살충제로 수많은 생명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라리아 질병 자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DDT는 독성과 발암성 때문에 제조가 금지되는 바람에 그사이 모기와 질병들은 다시 한번 기세를 되찾고 세계의 지배자로 복귀했다.
6. 모기의 진화 : 퀴닌과 DDT에 대한 내성을 키우다
더 중요한 것은 모기도 함께 진화했다는 사실이다. 모기는 내성이 생겨 우리가 만들어내는 항 말라리아제를 앞질렀다. 중국의 여성 과학자, 투유유가 (마오쩌둥의 프로젝트 523을 통해) 재발견한 아르테미시닌의 항말라리아 효능은 열대열대열말라리아종에 대해서 현재까지 최선의 요법이지만 (이 발견으로 2015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렇게 어렵게 찾은 치료법도 완벽하지 않았다. 2008년 캄보디아에서 아르테미신으로 만든 신약에 대한 내성을 가진 모기가 발견된 것이다...ㅠㅠ
말라리아 치료법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은 투유유
한 가지 질병으로 노벨상을 네 번째 수상한 것은 말라리아가 처음이다. 그만큼 인류는 말라리아 치료법에 목말라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랜 기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전염병은 정복되지 않았고, 완벽한 치료법도 없다. 한편 모기는 우리가 만드는 모든 약물에 대해서 재빠르게 내성을 키워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 이런 느낌이 들까? 미국의 수사 기자인 소니아 샤의 다음 말은 말라리아에 대한 모든 것을 함축해 놓은 것 같다.
인간은 고대 시대부터 말라리아를 알아왔지만,
어째서인지 말라리아는 여전히 우리의 무기를 무력화한다.
-소니아 샤 Sonia Shah
이제 모기들은 말라리아 외에도 뎅기열, 웨스트나일과 지카 바이러스를 옮기고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99년 여름에는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설립된 이후로 뉴욕시에서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웨스트나일 바이러스 환자가 하루에 4명이 입원하면서 뉴욕시가 마비된 사건이 있었고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아주 큰 이 모기 매개 바이러스를 생물 테러 공격으로 추정했다)
웨스트나일 바이러스 감염 경로 (출처: http://www.abcdcatsvets.org)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지카 바이러스가 등장했다. 1947년 우간다의 원숭이에게서 처음 발견되었던 이 바이러스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한정되었다가 동쪽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2015-2016년까지 유행한 이 바이러스 역병으로 약 150만 명의 사람들이 감염되었다. 지카 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은 매개자가 모기 외에 성적 접촉을 통해 그리고 산모에서 태아로도 감염된다는 사실이다. 임신 중 태아에게 전염된 지카 바이러스는 '소두증'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아이들의 숫자가 3,500건 이상 보고되었다고 한다.
지카 바이러스와 웨스트나일 바이러스의 사촌 격인 뎅기열과 치쿤구이야열의 감염률 또한 1960년 이후 30배 증가했다. 상황이 점차 심각해지다 보니 국제적으로 모기를 퇴치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게이츠 재단을 비롯한 자선단체들은 세계 최초의 말라리아 백신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7. 모기에 대응한 여섯 번째 반격 : 유전자 가위
말라리아 백신 개발은 경쟁적으로 진행 중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신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것처럼 그 효과가 단기간으로 끝난다는 것이 문제다. 끝없이 변태 하는 말라리아 원충에 대항해서 우리가 만지작 거리고 있는 카드는 '유전자 가위'다. 우리는 이제 실험실에 앉아 유전자를 손보는 것만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거나 주목할 이유가 없는 생물종을 멸절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모기 학살 : 우리는 유전자 가위로 안전하게 말라리아를 없앨 수 있을까? (출처: geneticliteracyproject.org)
하지만!
문제는 이 카드를 모기를 죽이기 위해 고민해 봐야 할 것은 '정말 유전자 가위를 써야 하는가!'다. <모기>의 저자 와인 가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을 모두 다룬다.
자연선택 vs 인류의 유전자 조작
'유전자 가위' 사용 반대: "인간과 모기 모두 전 지구적 생태계와 생물권의 일부이며, 생태계와 생물권은 자연적이고 살아 숨 쉬는 전제와 균형의 체계 속에 존재한다. 최고 포식자를 퇴치해 힘의 흐름을 방해한다면 목숨을 건 러시안룰렛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vs
'유전자 가위' 사용 찬성: "모기와의 싸움은 언제나 생사가 달린 문제다. 평등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모기와 모기 매개 질병을 지구 상에서 박멸해야 한다는 반론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기도 힘들다."
(출처: <모기>, p.636).
두 가지 큰 갈림길에서 무엇이 맞다고는 할 수 없다. 모기의 기생충 매개 능력을 유전자 편집으로 제거한다면 영원해 보였던 말라리아와의 싸움을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전자 가위를 다른 사악한 의도로도 사용될 수 있지 않은가? 유전자 가위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영화 <가타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멸절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하지만 이 문제를 판단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유전자 가위의 잠재력을 모르는 상황에서 쉽게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내 아이가 모기매개질병에 걸린다면 당장이라도 유전자가위를 사용하자고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결정은 도덕적이고 이해관계에 얽혀있지 않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게이츠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2016년 기준 유전자가위 모기 연구에 투자한 자금만 총 7,500만 달러) 빌 게이츠가 얼마나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게이츠 재단의 목적은 말라리아와 여타 모기 매개 질병의 근절이지, 모기를 멸종 위기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판단하는 기준이다.
(전적으로 누가 판단하는가? 에 달려있다)
이제 우리가 모기의 게놈을 조작할 수 있는 만큼
마침내 모기에게 반격할 기회를 얻은 셈이지만,
역사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의를 기울이고 또 기울여야 한다.
앞서 DDT와 관련해서도 그랬듯, 반격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 <모기>, 티모시 C. 와인가드
책을 덮고 나니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좀비 영화를 본 느낌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말라리아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와 비슷한 성향(판타지나 전쟁영화 좀비 영화를 좋아하는)이라면 한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얼마나 전염병이 무서운지, 그리고 인간은 얼마나 잔혹하게 서로를 죽여왔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누군가 모기 매개 질병에 감염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저 개인의 잘못이나 불행으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에게 위협적인 모기의 존재를 알리는 경고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경고장을 넘어서 현재 인류가 어떤 기로에 서 있는지 긴 역사를 통해 돌아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문제들을 모르고 당하기 전에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직시할 수 있게 해 준다.
초반에 언급했던 <퇴마록>의 주인공 현암의 결정처럼 새롭고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을 때에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주목할 것은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가 아니라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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