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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띠프렌 Jun 17. 2021

할머니의 자전거

제비꽃 연가 (창작 단막희곡 1)


2020년 5월 13일  시작.

2020년 12월 4일 창작 단막 희곡 탄생.





할머니의 자전거



[등장인물]


호호 할머니 72세. 은색 단발 곱슬머리.

작고 왜소한 체격에 단정한 외모.

틀니를 뺀 입 모양을 손으로 가리고 ‘호호호’ 웃는 모습에 호호 할머니라 부른다.

할아버지 75세. 시인. 7년 전 담낭암으로 사망.

다정다감한 성품.

돌아가시기 전에 홀로 살아가야 할 할머니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준다.

 

새댁 35세. 결혼 6년 차.

종갓집 외동 며느리. 은둔형 외톨이.

두 번의 유산 경험이 있고 세 번째 인공수정으로 임신 중 두 번째 유산 후

예기치 않은 할머니 미역국에 위로받으며 기운을 차리게 된다.

 

유건 5세. 유치원생.

외동이지만 눈치도 빠르고 친화력 있는 성격.

건아 맘이 직장 일로 늦은 귀가 시 종종 할머니께 부탁하고 보살핌을 받는다.

 

유건 맘 38세. 웨딩플래너.

야무지고 도회적인 이미지.

워킹맘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아들 건아에겐 늘 부족한 엄마로 미안해한다.

경비아저씨 62세. 엔지니어로 정년퇴직.

빠른 일 처리로 신임이 두텁다.

 

아들(석현) 48세. 소아과 의사.

반듯하고 세심한 성격. 호호 할머니 외아들

 

 

 

 

 

 [1장]

 

아파트 노인정 앞 정자.

어둠 속에서Tendres souvenirs-Steve Barakatt’ 음악 소리 서서히 들린다.

음악 소리 중간 즈음 낡은 괘종시계 소리 8번 울린다.

지친 표정으로 땀을 닦으며 등장하는 호호 할머니.

호호 할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전거 보관함을 바라보다 한숨)

휴~@ 영감님, 대체 어디 계신 거유..

어제도 영감이 나 태우고 102동 한 바퀴 돌고 왔으면서.

밤새 안녕이라더니 이게 뭔 일이래요...

(누가 볼 새라 얼른 촉촉해진 눈을 한 손으로 쓱쓱 훔친다)

 

음악소리 서서히 사라진다.

마침 정자 앞을 지나던 새댁. 임신 중 갑자기 불어난 배가 불편한지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배를 감싸며 조심스럽게 등장한다.

새댁을 발견하곤 얼른 일어나 다급한 손짓으로 새댁을 부르는 할머니.

 

호호 할머니 새댁~ 혹시 내 자전거 못 봤수?

새댁 (무심코 지나치려다 할머니의 다급한 손짓에 가볍게 목례하며 뒤로 젖혀진 몸을

바로 세우려 애쓴다)

아.. 안녕하세요. 자전거.. 요? 자전거 잃어버리셨어요? 언제요?

호호 할머니 (두리번거리며)

아~글쎄 아침에 나와 보니 없네. 평상시처럼 세워 놨건만.

새댁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아파트 입구 쪽을 향하며)

그걸.. 누가 가져갔을까요?

저... 할머니, 요 앞에서 누굴 만나기로 해서요. 죄송해요.

호호 할머니 (내심 서운한 표정으로 새댁에게 가보라며 손짓)

볼일 있나 보네. 바쁜데 어여 가 봐요!

새댁을 보내고 정자로 돌아가 철퍼덕 주저앉는 할머니.

지친 무릎을 움켜쥔 손으로 툭~! 툭! 두드리곤 다시 일어나 자전거를 찾아다닌다.

할머니 모습 뒤로 서서히 조명 어두워지고 음악 소리에 아이들 재잘거림,

화답하는 유치원 선생님 목소리가 들린다.

 

To way to school – 김광민’ 음악 흐르고

안녕하세요~ 선생님 / 네~ 안녕하세요! 버스 출발하는 소리.

음악 소리 서서히 사라진다.

 

[2장]

 

102동 경비실 안.

조명이 켜지면 무대에 허리를 구부린 채 콧노래 흥얼거리며 택배 물품을 정리하고 있는 경비아저씨.

호호 할머니 (한숨 내쉬며 옆에서 택배 물품을 주섬주섬 챙겨주면서)

김 씨, 좀 해 줘요~

경비아저씨 (경비 모자를 한 손으로 추켜올리며 양미간을 찌푸린 채)

그게 ~ 아이코! 그 물품은 307호 가는 거라.. 그쪽이 아닌데...

호호 할머니 (겸연쩍어 코를 쓱쓱 문지르며)

에구구~ 내 정신 좀 봐. 자전거 생각에.. 그만.

경비아저씨 (난처한 표정)

할머니~ 이른 시간이라 방송은 못 하고요.

아파트 주변을 샅샅이 찾아봤는데 어디에도 없어요.

어제 들어가실 때 자전거 보관함에 놓아둔 거 맞으세요?

호호 할머니 (속상한 듯)

그럼요! 매일 타던 자전 건데 내 두는 곳도 모를까 봐요?

경비아저씨 (손사래를 치며 달래는 말투)

아휴~ 그런 게 아니라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102동 사람이면 매일 아침 할머니 자전거 타시는 거

다 아는데... 누가 가져갈 리 없죠 - 오!

경비아저씨 (목소리를 낮추며)

이참에 새 자전거 하나 사시죠. 너무 낡아서 타실 때마다 다치실까 조마조마했어요.

호호 할머니 (새어 나오는 한숨)

누가 돈 없어서 못 사나요? 그게 어떤 자전건데...

이따가 방송 한 번만 해 주세요. 알았쥬?!

 

재차 확인 맨트를 하면서 천천히 경비실을 나서는 할머니.

 

경비아저씨 (사라지는 할머니 뒷모습을 보며)

쉽게 포기하실 분이 아닌데 어쩌지.

그걸 알려 드려야 하나..?! 쯥. 후훔~!

 

뭔가 감추는 표정의 경비 아저씨,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콧노래 부르며 다시 물품 정리를 시작한다.

조명 어두워진다.

 

[3장]

 

102동 1F 엘리베이터 입구. 괘종시계 소리 9번 울린다.

조명 켜지면 무대에 서 있는 할머니.

엘리베이터 열리자 후다닥 뛰어나오다 할머니와 부딪히는 유건.

 

호호 할머니 (놀라 엉거주춤 허리를 수그리고 건아를 부축하며)

아이쿠! 욘석아, 다치잖아~ 조심해야지! 어디.. 다친 곳은?

 

넘어진 건아를 일으켜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고 다친 데는 없는지 이리저리 살피고는

양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삐딱해진 모자를 바로 씌워 주는 할머니.

 

유건 (모자 속으로 손을 넣어 머리를 긁적이며)

할머니, 왜 거기서 나와? 나 유치원 가야 하는데.

호호 할머니 (머뭇거리며)

건아, 엄마 출근하느라 유치원 버스 놓쳤구나!

유건 (두 눈을 좌우로 움직이다가 뭔가 생각난 듯)

할머니, 나 자전거 타고 가면 안 돼?

호호 할머니 (삐죽이 입을 내밀며)

안 돼! 엄마가 안 된다고 했다며.

지난번 너 태우고 유치원 가서 엄마가 화난 거야.

그래서 며칠째 할미 집에 못 왔잖아.

유건 (나지막이 할머니 귀에 대고 애교 말투로)

엄마한텐 비밀하면 되잖아~ 응?

유건 나, 할머니 자전거 타는 거 좋단 말이야~ 하~나도

안 위험한데!?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그래~칫!

호호 할머니 (건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에구~ 우리 건아가 할미랑 자전거 타는 게 좋았구먼!

근데 할미, 자전거 잃어버렸어.

유건 (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 혀 짧은 소리로)

할머니 자전거 업. 떠. 졌어? 왜~에?

호호 할머니 할미도 몰라. 어쩌누...

호호 할머니 (습관적으로 입에 손을 넣는 건아를 보고)

건아, 에비! 입에 손 넣으면 지지다, 지지!

(침 묻은 건아 손가락을 빼서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할미랑 유치원까지 걸어갈까?

유건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한발 한발 구령에 맞추며 )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섯!

 

건아 손 잡고 유치원으로 향해 가는 동안에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유심히 살피며 걷는 할머니.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4장]

 

아파트 산책로 벤치 주변에 희뿌연 안개가 서리고 ‘제비꽃 – 조동진’ 음악이 나지막이 흐른다.

산책로 벤치 옆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찾고 있는 할머니.

조그마한 보라색 오랑캐꽃을 발견하곤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레이션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고 싶어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 너머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안개 사이로 조명이 서서히 들어오면 할머니 등 뒤에서 제비꽃을 든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등장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향해 오라는 손짓)

임자, 여기 와 보소. 봄은 봄 인갑 소!

(허리를 굽혀 보라색 꽃 무리를 살피다 할머니를 향해)

요~오랑캐꽃이 보고 또 봐도 임자 닮았네그려~허허.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수줍듯 빙그레 웃는다)

할아버지 (오랑캐꽃을 손끝으로 살살 흔들며)

사는 게 꽃 같아. 겨우 내 움츠리다 따뜻한 봄 햇살 한 줌에 새 각시 말간 얼굴로

나, 여기 있소! 살짝 내비치곤 기쁨 주고 예쁨 받다 어느새 사라지곤 하지....

할아버지 (아련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꽃 같은 임자와 함께한 이 세상이 내겐, 늘 봄 같았소.

임자 있는 그곳에... 늘 내가 있을 거요...

호호 할머니 (애써 밝은 목소리)

그런 소리랑 마셔요. 어디 먼 길 떠날 채비하는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툭! 떨어질 듯 어느새 할머니 눈가엔 그렁그렁 이슬이 맺힌다.

할아버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간다.

할머니, 따라가려 하지만 두어 걸음도 못가 멈춘다.

어느새 벤치엔 할머니 혼자만 덩그러니 앉아 있다.

조명 서서히 어두워진다.

 

[5장]

 

102동 경비실 앞.

어깨를 아래로 떨군 채 터벅터벅 경비실로 향하는 할머니.

102동 입구에서 새댁이 할머니 부르는 소리.

 

새댁 (부른 배를 잡고 힘겹게 손을 흔들며)

할머니~ ~ 할머니~

호호 할머니 (피곤해서 눈꺼풀이 반쯤 풀린 눈으로)

지금 날 부른 거유?

새댁 (가쁜 숨을 애써 가다듬고)

할머니, 한참 찾았어요. 점심은... 드셨어요?

호호 할머니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아니... 밥 먹을 경황이 어디 있누.

(무슨 말을 하려다 흐지부지 말끝을 흐리는 할머니)

건아 유치원 데려다주고 할아버지랑...

새댁 (눈치를 살피며)

할머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자연스레 할머니 팔을 부축하며 정자로 자리를 옮기는 새댁

 

호호 할머니 (궁금한 듯)

새댁, 왜? 무슨.. 일 있수?

새댁 (아랫입술을 깨물며)

저... 할머니, 자전거 말인데요.

호호 할머니 (새댁 앞으로 몸을 바짝 당겨 손을 움켜잡으며)

어디서! 어디서 찾았는감?

새댁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실은, 조금 전에 강 선생님! 아니 아드님 전화를 받았는데요.

호호 할머니 (놀란 듯)

석현이가? 새댁한테!? 어쩐 일로?

또 아기가 잘못됐다는 거야?

새댁 아, 아뇨! 제게 용무 있으셔서 연락하신 건 아니고요.

할머니와 연락 안 되신다고.

호호 할머니 난 또 뭐라고. 휴~@... 또 우리 새댁이 큰일 치르는 줄 알고 놀랐구먼!

새댁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조심스레 말을 꺼내며)

할머니께 말씀을 못 드렸다면서, 새벽에 아드님이 자전거를 가져가셨데요.

호호 할머니 (입을 벌린 채 기막히듯 어이없는 표정)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 아들이 가져갔다고?!

 

할머니, 다급히 아들에게 전화한다.

 

호호 할머니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

여보세요.

Voice(석현) (잔뜩 볼멘소리)

어머니! 온종일 연락도 안 되고.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호호 할머니 (앙칼진 목소리)

어미는 왜 찾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데! 말도 없이.

Voice(석현) (격앙된 소리를 누르며)

몇 번을 말씀드려도 늘 그 자리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아!

그만큼 하셨으면 이젠 아들 심정도 아실 때도 되셨잖아요.

호호 할머니 (화를 참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할머니)

뚜. 뚜. 뚜. 뚜.

 

새댁 (할머니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할머니, 괜찮으세요?

호호 할머니 (고개 숙인 체 맥없는 손짓)

아녀. 어여 가 봐. 괜찮으니까.

 

새댁, 걱정에 찬 눈빛으로 뒤돌아보며 들어간다.

계속 울리는 호호 할머니의 전화.

할머니, 전화 받지 않고 먼 곳 바라본다.

할아버지, 제비 꽃다발 들고 걸어온다.

제비꽃을 할머니에게 건네주고 옆에 앉아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듣는 할아버지.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 쯧쯧. 애가 탔네그려~ 애가 타.

아~ 그러게 왜 지어미 부아 나게 해서는...

호호 할머니 그게 나한테 어떤 자전건 줄 뻔히 아는 놈이 어떻게 그래요?!

수술하고 편치 않은 몸으로 매일 자전거 타는 법 알려 주고,

그 덕에 영감 가고 없는 세월을 그 자전거 타고 다니며

함께 다니던 길목마다 영감이 늘 옆에 있는 것만 같아서. 흐흑..

 

흐느끼는 할머니를 아무 말 없이 꼭 안아 주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임자, 그때가 석현이 다섯 살인가?! 포대기에 석현이 둘러메고 자전거에 태워

장날에 데리고 다니던 걸 기억하더라고!

튀밥 터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허리를 얼마나 꽉 부여잡던지... 허허.

그 겁 많던 똘망이가 이제 어엿한 의사에 아비 닮은 귀한 손주도

떡~하니 안겨 주고. 더는 뭘 바라겠소.

지도 그 고물 자전거 보면서 그동안 심란했던 게야. 암!

그 맴도 이제는 헤아려 줄 때도 됐지. 안 그려~임자!?

호호 할머니 여보... 흐흑. 당신 손때 묻은 자전거.. 아직은...

할아버지 꽃 진다고 잊은 적 없듯이 우리 기억의 향기로 남겨 두소.

임자, 이제 그만 놓아주구려.

 

흐느껴 우는 할머니 눈물을 닦아주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마주 보는 할아버지.

 

[6장]

 

102동 앞.

경비 아저씨, 콧노래 부르며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다.

새댁, 출산 준비물이 담긴 가방을 들고 나온다.

경비아저씨, 빗자루를 한쪽에 세워두고 새댁에게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괘종시계 소리 9번 울린다.

 

경비아저씨 산달이 가깝다더니 출산하러 가요?

새댁 네..

경비아저씨 가방 이리 주소. 내 택시 잡아 드릴게.

새댁 아니, 그게...

경비아저씨 (두리번거리며)

누구 기다려요? 아, 그렇지! 할머니가 오실 때가 됐는데~에?

 

경비실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유건.

 

새댁 (놀라 배를 감싸고 다가오는 건아를 한 손으로 막으며)

어머! 건아, 너 유치원 안 갔어?

유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삐~뽀! 삐 뽀!♬♪ 나와야 해요! 우~웅! 왜 안 오지~이?

 

저만치 민트색 여성용 자전거를 타고 오는 할머니. 경비실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내린다.

 

유건 (새 자전거를 요리조리 만지며 흥분해서는)

우우~와~왕! 딘. 따. 조-타! 바구니도 있네~에?

호호 할머니 (새댁을 보고 반색하며)

아휴~ 새댁! 채비 다 했어?

새댁 (기다렸다는 듯 반기며)

네~ 할머니. 아드님이 사주신 그 자전거 맞죠?

할머니께 참 잘 어울려요. 무엇보다 안심되네요!

 

근처에 있던 경비아저씨 슬쩍 한마디 건넨다.

 

경비아저씨 실은, 아드님이 옛 자전거를 가져갔다가 도로 갖다 놓기를 여러 번 하셨어요.

행여 할머니 맘 상하실까 봐 내색도 못 하고.

고민 끝에 작심하고 하신 일이죠.

(너스레 떨며)

새 자전거 타고 오시니 아파트가 다 훤합니다. 멋쟁이 할머니!

호호 할머니 아니, 다 알면서 그리 맘 졸이게 찾게 만드는 건 또 뭐람.

거참! 얄궂다. 얄궂어! 그래서 그리 너스레를 떨고 있구먼!

힐긋 째려보는 할머니 모습을 보고 경비아저씨 일부러 오버하며 화들짝 놀라는 표정에

두 사람 피-식 웃는다.

 

새댁 민트색 참 예쁘네요. 저도 아기 낳고 살까 봐요.

호호 할머니 지난번 일도 있고 이번에는 못 이기는 척 받았지~뭐!

영감님이 좋아하는 색 이라우. 무엇보다 내 몸에 맞으니 덜 힘들 긴 해.

그건 그렇고. 새댁, 석현이가 친구에게 연락해 놨다고 하지?

그 친구 의예과 시절부터 석현이 따라와서는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오.

밥값은 톡톡히 할 만큼 석현이 부탁이니까 특별히 신경 써 준다고 했으니

출산 걱정은 말아.

그 녀석 실력 좋다고 이미 소문이 났어.

울 새댁 앞으로 웃을 일만 있을 텐데 걱정 붙들어 매고,

아무 염려 말고 맘 편히 다녀와. 알았지?

자자~ 에구 사설이 너무 기네. 어여 병원에 갈 채비 하구려.

그럼! 이제 미역국만 맛나게 끓여 놓기만 하면 되겠구먼!

새댁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네.. 할머니. 모든 분들 너무 감사드려요!

 

새댁, 할머니와 포옹한다.

할머니, 새댁 등을 토닥인다.

 

호호 할머니 모쪼록, 순산하고 돌아오소!

경비아저씨 새댁, 저기 택시 오네요.

 

새댁, 가방 들어주는 경비 아저씨와 함께 나간다.

할머니, 잠시 두 손 모으고 기도한다.

 

♬삐뽀삐뽀삐뽀♬♪ 날카롭게 울리는 자전거 벨 소리.

 

유건 (자전거 벨을 재촉해서 울리며)

할머니~~ 나, 유치원 늦었어~~ 어!

호호 할머니 (난처한 듯)

건아, 엄마가 알면 혼나려고, 어쩌려고 그래!

유건 (못 들은 척 딴청 피우며)

새 자전거는 괜찮아~여! 빨랑빨랑! 늦는단 말에 요~오!

 

할머니, 못 이기는 척 보채는 유건을 뒷좌석에 태우고 간다.

텅 빈 무대.

조명 어두워진다.

 

[에필로그]

 

‘We had today – Rachael portman’ 음악 흐르고 조명 들어온다.

 

산책로. 숲길 사이로 작고 가녀린 보랏빛 물결이 물들어 있다.

민트색 새 자전거 세워져 있다.

누군가에게 답하듯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는 할머니.

오랑캐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머니 귓가에 스치듯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의 말(N)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마종기-

 

 

음악 배경으로 조명 서서히 사라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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