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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타로 금식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습관,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습관

by 섬섬옥수


남들에게 이야기한 적 없는 내 비밀 아닌 비밀을 꼽자면, 종종 유튜브에서 타로 제네럴 리딩을 듣는다는 점이었다. 글에서도 알음알음 언급했듯, 일단 내 대외적인 종교는 기독교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쫄보의 유튜브 타로 입성




어느 순간부터인가 유튜브에 타로 리딩 채널들이 등장했다.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번화가며 대학로에는 타로 카페나 점포들이 줄을 지었고, 대학에 아직 재학 중이던 시절, 학교 축제가 열리면 사주며 타로를 봐주는 부스가 성행했으니. 내리는 비에 시나브로 젖는다더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 역시 시류를 따라가고 있었다.


사주라던지, 점을 보러 가는 건 거리낌이 다소 있었다. 동양의 미가 물씬 풍기는 화법에, 눈이 부락부락한 그림이 벽에 걸려있을 것만 같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앉은 무속인이 별안간 신이 들려 이상한 목소리와 말을 하는 게 두려울 것 같았다. 지인 중에도 이러한 점이 마음에 걸려 사주나 점을 보러 가는 '전통적인' 한국 무속신앙은 도전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가 들 수록 우리 것의 구수함과 좋음을 느껴가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MZ세대 대다수는 '투 머치 동양풍'에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다.


왠지 무서운 한국 무속신앙과는 대비되게, 많은 젊은이들이 비교적 마음 편히 대하는 것이 타로였다. 이미 많은 지인들이 종종 타로를 보고 있었고, TV 예능이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연예인이나 주인공이 타로를 보러 가곤 했다.


너도 한 번 봐봐. 나름 재밌어. 잘 맞기도 하고.


그렇게 지인의 권유로 타로 리딩을 듣기 시작했다. 아 물론, 오프라인으로 타로 카페를 찾는 것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서. 각 잡고 타로 카페를 가는 건 좀 모양 빠지잖아? 나름대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었으니 양심이 찔리기도 하고? 또, 내 얼굴을 보고 읊어주는 운세가 좋지 않으면 괜히 그렇게 될 것 같아 불안하니까.

변명 많은 쫄보는 그렇게 친구 따라 유튜브 제네럴 타로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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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네럴 타로가 뭔데?




타로 카페가 익숙한 분들은 많겠지만, 아마 제네럴 타로라는 것에는 아직 생소함을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타로 카페에서의 리딩을 그대로 온라인으로 옮겨놓은 것과 다름없는데, 하나의 차이점이라면 1:1이 아닌 만큼 집단 군을 형성해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해당 채널 주인이 카드 세팅을 4~5개 정도로 그룹핑하면 시청자가 그 그룹들 중에 번호나 카드를 골라 해당되는 결과를 듣는다.

종류는 대체로 연애운이 많다. 아무래도 시청층이 여성이 많은지, 카테고리도 월별 연애운이나 솔로 연애운부터 특정한 사람과 관련된 연애운까지 다양했다. 미신을 잘 믿지 않았던 내가 타로에게는 어느 정도 의지를 했던 연유가 여기에서 왔다.


2년 전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겨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고 있었다. 함께 벚꽃도 보러 가고, 밥도 먹으러 가고. 저녁이면 같이 영화도 보고 내 차로 드라이브도 하고. 저 사람도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고백을 안 하지? 연애에 있어 반드시 남자가 먼저 고백을 해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다. 먼저 당차게 고백하는 여성, 얼마나 멋있는가. 하지만 그 당시의 내겐 확신이 없었고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시원시원한 답을 좀 내보라는 심산으로 지인이 추천해 주었던 타로를 건드렸는데, 웃기게도 그 당시 우리의 연애 흐름이 그 연애운 타로처럼 흘러갔다.

그 한 번의 경험이 컸던 걸까. 그 후로 나는 종종 유튜브를 켜 카드 세트의 번호를 고르곤 했었다.


미신을 믿지는 않는 편이었다지만, 사람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흥미가 있었기에 전에 들었던 심리학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이 있다. 같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결국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느냐 닫혀있느냐에 따른다고.

만일 한 개인이 타인이 말해주는 내용을 기대하고, 그걸 믿고 싶어지면 어떤 구석에서라도 자신과 비슷한 점을 찾아내 신뢰할 것이고. 말을 하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애초부터 낮고 기대가 전혀 없다면,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자신에겐 해당되는 부분이 없다고 느낄 것이라고 교수님은 이야기했다.


제네럴 리딩을 들을 때, 그 심리학 개론 수업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은은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으로 마음의 소리는 무시하고 넘어갔다. 대부분의 리딩 내용은 나에게 위안을 주었고, 좋은 말들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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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죄다 좋아한다고만 말하는 거야?

차라리 그가 날 싫어한다고 말해줘.




그러다 문제가 터졌다. 내 연애전선에 큰 변이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2년 전 만났던 남자와는 1년 정도 사랑을 했다. 그와의 연애를 마치고는 연애 휴식기를 가졌다. 실은 그 연애 휴식기 동안,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랴 취업 준비를 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연애를 안 했다기보다 못했다는 말이 더 알맞다.

그런데, 연애를 해본 이들이라면 다들 느끼겠지만 여러 번의 연애를 거쳐왔더라도 유독 아픈 손가락이 있다. 아쉬움이 남는 사람이 있다. 아름답기만 한 이별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만은,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좀 더 나은 마지막이 되었을까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게 되는 인연이 있지 않는가. 내 연애 공백기에 그에 대한 미련이 좀 찾아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면 생각도 안 나게 된다고.

옛 말 틀릴 것 하나 없었다. 어쩌면 유독 그에 대한 생각이 짙어진 건, 겹치는 지인들도 많고 손을 뻗는다면 닿을 수는 있는 거리에 서로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건, 내가 그 구질구질하고 꼴사나운 재회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는 점이었겠지만.


'그 사람 내 생각할까?', 'N월 재회운', '그 사람, 연락이 올까?' 주제의 제네럴 리딩을 클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리딩에서 '상대방 분도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일이나 다른 집중할 것들이 많아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만약 안 좋게 헤어지신 분들이라면 재회를 해도 또 똑같은 일로 싸우게 될까 봐 연락 앞에서 두려움을 많이 느끼시는 것 같아요.'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기분이 좋았다.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얄궂지만 그렇지 않은가. 나 혼자만 생각하는 것보다 상대도 나를 생각했으면 좋겠고, 내가 힘들어했던 만큼 그 사람도 힘들어했으면 좋겠는 것이. 매번 질척인다 생각했던 윤종신 님의 노래 《좋니》가 그렇게 찰떡일 수가 없더라.


일이 끝나고 집에 와 누우면 자기 전에 제네럴 리딩을 켰고, ASMR 못지않게 잔잔하고 따뜻한 채널 주인의 목소리에 잠들기도 했다. 그러다 친한 언니의 잔소리에 정신이 팍 들었다.

넌 무슨, 교회 다닌다는 애가 타로도 보고 그러니?

이따금씩 섬세하지 못해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솔직함이 매력인 언니였다. 너무 직설적이더라도 옳지 않은 말 맘에 없는 말은 하지 않는 언니 었기에.



물론 나는 종교나 민간신앙은 개인의 자유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교회나 성당을 다니면서 그 외의 민간 신앙에도 손을 뻗치고 있는 이들이 주변에도 꽤 되었고, 그걸 내가 터치할 정당한 권리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나 그 당시 양심이 조금 찔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걸 시작으로, 결국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마냥 '그 사람도 너를 좋아해'가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달았다.


그래, 나는 사실 그가 나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원했다. 속시원히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듣는다면 차라리 지나가버린 인연에 눈길을 주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해당 영상 속 내가 고르지 않은 번호의 리딩까지 전부 들어보았다. 그런데, 웬만한 영상에는 좀처럼 '사실 그 사람은 여러분을 잊은 것 같아요. 자신의 삶에만 충실하고 있네요.' 하는 리딩이 잘 없었다.

타로 리더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소중한 구독자 분들을 생각하여 최대한 상처 받지 않는 방향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읽어주려 하는 그들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 하나의 멘트가 희망고문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눈을 뜨고 앞을 내다보는 대신 귀로 읊어주는 달큰하고 마음에 드는 이야기에 마음을 의탁해버리는 것이다.




뭐든 과유불급이라더니


건강하게 유튜브 채널을 소비하는 것으로서 영상을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개인의 사적인 부분과 연관되기 쉬운 부분이다 보니 과하게 몰입하는 순간도 있을 수 있다. 내가 타인이 읽어주는 나의 앞날에, 그리고 남과 나의 관계에 너무 많이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머리 위에서 경종이 빙글빙글 울려댈 때, 자신을 돌아보고 멈출 것을 멈추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내게는, 뒤를 돌아보게 하는 습관이 유튜브를 통해 타로 채널을 시청하는 것이다. 비슷한 것으론, 우울할 때 들으면 더 우울해지는 노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는 것이었고. 한 때 사랑했던 이를 놓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띄웠다.

나는 '그대'를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때'를 그리워했던 건 아닐까.

쉬이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시절의 추억과 사람이 너무 엉겨 붙은 탓일 터. 나는 뒤를 돌아보게 하는 습관을 이제는 묻어두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우리의 삶은 앞으로도 지속되고, 더 즐겁고 대단한 사건들로 복 작일 테니까.


아, 그래서 그 미련이 뚝뚝 떨어지던 추억은 어떻게 갈무리했냐고? 글을 썼다. 브런치 글 두 개 분량을 죽죽 써서는 작가의 서랍에 모셔두었다. 아마 일평생 서랍 바깥으로 꺼낼 일 없겠지만. 꽤 괜찮은, '감정 분리하는' 방법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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