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듄: 파트 2>
<듄: 파트 2>는 전편에서 황제와 하코넨의 계략에 모든 걸 잃고 사막에 떨어진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와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가 뛰어난 전사들인 프레멘 민족을 동원해 야심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다. 아라키스 행성의 이 사막 민족 사이에서 '퀴사츠 헤더락(길을 단축시키는 자)', '마디(낙원으로 이끌어 주는 자)', '리산 알 가입(외계의 목소리)'이라는 호칭이 모두 폴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폴은 예언과 종교적 믿음을 이용하려는 어머니와 다른 길, 착취와 배신을 일삼는 하코넨과 다른 길을 가고자 한다.
제시카가 사막에서 살아남는 데에 두 가지 동기가 작용한다. 아들 폴을 지키는 것, 그리고 베네 게세리트로서 자신이 퀴사츠 헤더락을 낳았다는 믿음을 증명하는 것. 사막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하코넨 병사들을 프레멘들이 처치하는 동안, 폴과 제시카가 일부 병사들에게 발각된다. 어머니와 뱃속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폴은 병사 한 명을 죽인다. 제시카는 폴이 등을 보인 사이를 노리는 또 다른 병사를 죽인다. 태양을 등진 채 능선 위에 선 제시카의 실루엣은 아들을 지킨 어머니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후 프레멘은 예언을 염두에 두고 제시카에게 대모 역할을 이어받기를 요구한다.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는 그녀가 대모가 되지 않는다면 폴도 '마디'가 아닐 것이고 제시카는 죽여서 물을 확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폴이 사막에서 하코넨 손에 죽었다면 이 역시 그가 '마디'가 아니라는 의미이므로 제시카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베네 게세리트로서 자신이 퀴사츠 헤더락의 어머니라는 믿음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반면 초반에 폴은 예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예언자로 군림하기보다 프레멘의 일원으로 대등한 관계를 맺고자 예언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먼저 다가간다. 그런데 폴은 아버지 레토 아트레이데스와 달리 황제와 하코넨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운다. 아트레이데스 혈통으로서 수백 년 동안 축적된 하코넨 가문에 대한 정보력 그리고 프레멘의 탁월한 전투 기술을 결합하면 종교적인 믿음을 이용하지 않아도 아라키스 행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제시카도 불신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지만 두려움을 이용한다. 그녀는 폴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프레멘의 대모의 지위를 이용해 예언에 힘을 싣는다. 그녀는 의식을 열어젖히는 맹독인 '생명의 물'을 마시기 전 두려움은 작은 죽음이라는 금언을 읊조렸다. 두려움이 인간 존재를 왜소하고 무력하게 만든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 전략적으로 프레멘들 중 가장 약한 자들에게 두려움을 심는다. 제시카는 생명을 품은 채로 하코넨의 생명을 빼앗았고, 대모로서 프레멘의 정신을 죽이는 길을 택한다.
프레멘 내에서도 예언을 열렬히 믿는 남부 출신 스틸가, 예언보다 프레멘의 실질적인 힘을 믿는 북부 출신 챠니(젠데이야)로 크게 나뉜다. 스틸가는 신중한 듯해도 이미 믿음에 마음이 기울어 있다. 그는 믿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남부 프레멘들에게 믿음을 부추긴다. 반면 챠니는 폴이 정직한 이방인이기에 그에게 마음을 연다. 즉, 프레멘에게 낙원을 가져다줄 예언자가 아닌 인간 폴을 사랑한다.
역설적으로 예언을 믿지 않은 챠니의 도움으로 폴은 프레멘 사이에 예언자로 받아들여진다. 챠니가 폴에게 프레멘으로 살아가는 법을 기본기부터 가르쳤는데, 프레멘들은 '예언자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예언대로 폴이 타고나기를 잘하는 거라고 믿어 버린다. 폴이 첫 시도에 거대한 사막벌레를 몰고 사막을 횡단하자 프레멘들은 예언자가 강림했다는 듯 감격한다. 폴이 무사히 관문을 통과해 안도하던 챠니는 한껏 맹렬해진 폴을 향한 숭배에 불길함을 느낀다.
아라키스 행성의 프레멘 민족에 예언을 심어 둔 건 베네 게세리트다. 베네 게세리트는 인간 정신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서 프레멘을 선택했다. 광활한 사막을 터전으로 하는 프레멘들은 몸에서 배출되는 수분을 재활용하며 살아간다. 게다가 아라키스를 지배하러 오는 가문마다 프레멘을 박해한다. 사막 위의 모든 걸 집어 삼키는 사막벌레는 인간 의식을 확장하는 스파이스 물질을 만든다. 혹독한 자연환경과 오랜 박해, 그리고 의식 차원에 대한 남다른 감각은 예언자 계시가 자리 잡는 양분이 되었다.
예언이 힘을 얻어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면서 폴과 주변 인물들 모두 체스 말로 동원된다. 폴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제시카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틸가는 믿음을 위해, 챠니는 폴을 향한 사랑에 의해 움직인다. 저마다 다른 동기를 품고 있지만 그들의 행보는 예언의 실현을 조금씩 앞당긴다. 오히려 각자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을 의심하지 않기에 성전(Holy War)을 향한 여정 속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나간다.
한편, 또 다른 퀴사츠 헤더락 후보 페이드 로타(오스틴 버틀러)가 아라키스에 등장해 프레멘의 중요 거점인 타브르 시에치를 함락시킨다. 이 공격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폴에게 충격을 준다. 스파이스를 먹어서 보는 환영만으로 하코넨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폴은 '생명의 물'을 마시고 쓰러진다. 그리고 챠니는 시하야라는 또 다른 이름이 의미하는 '사막의 샘'으로서 자신이 흘린 눈물로 폴을 살린다. 이때 제시카는 챠니에게 '너도 예언의 일부'라고 말한다.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를 알게 된 폴은 그토록 경멸하던 하코넨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드디어 마주한다. 자기 아버지를 죽인 블라디미르 남작(스텔란 스카스가드)이 제시카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할아버지다. 비열한 하코넨과 구분되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후계자라는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고 폴은 존재 깊숙이 상처받는다. 그러나 자신도 하코넨 일족이라는 사실이 폴의 복수심을 잠재우지는 못한다. 오히려 자신과 제시카도 하코넨의 방식으로 살아남을 거라고 말한다.
폴이 보는 거의 모든 갈래의 미래에서 프레멘이 절멸한다. 그런데 폴은 전편에서 쟈미스와 벌이는 결투에서 자신이 죽는 환영을 보았지만 승리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정체성을 버리고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거듭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프레멘이 절멸하는 미래는 폴이 복수심을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만 유효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폴이 복수를 포기했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졌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폴은 프레멘을 승리로 이끌고 대가문들과 성전을 벌이는 단 하나의 좁은 길로 나아간다. 폴은 황제를 향한 복수심이 정당하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품고 있다. 이에 비하면 프레멘 민족의 구원은 그들 스스로 해야 한다는 믿음은 쉬이 구부러진다. 타브르 시에치 함락 이후 프레멘들이 집결한 자리에서 폴은 자신의 예지력을 드러내고 예언 속 지도자처럼 군림한다. 프레멘들이 예언을 간절하게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는 녹색의 낙원으로 프레멘을 이끌겠다고 선언한다.
<듄: 파트 2>는 아트레이데스의 시체 더미로 시작해서 하코넨의 시체 더미로 마무리된다. 어머니를 비롯해 혈육을 무수히 죽였다는 페이드 로타처럼 폴은 자기 할아버지와 사촌을 죽인다. 형 라반(데이브 바티스타)을 바닥에 쓰러뜨려 신발에 키스하게 만든 페이드 로타처럼 폴도 황제가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손등에 입 맞추게 한다. 대가문들은 이룰란 공주(플로렌스 퓨)와 결혼하여 황제로 즉위하겠다는 폴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전언을 보낸다. 이에 폴은 프레멘을 낙원으로 이끌 성전을 시작한다.
그런데 폴이 모든 과거를 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 점이 있다. 사실 황제와 블라디미르 남작 모두 베네 게세리트 모히암 대모(샬롯 램플링)의 조종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공격한 일의 배후를 묻는 이룰란 공주에게 자기가 아니었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답한다. 하지만 폴은 기어이 블라디미르 남작을 죽이고 황제를 무릎 꿇게 만든다. 갈 곳 잃은 분노가 될 바에 허수아비라도 쓰러뜨리려는 맹목이었을까. 폴이 복수를 위해 낙원으로 이끄는 여정은 끝내 프레멘에게 정신과 육체의 죽음을 불러올 것이다.
예언을 부정하던 챠니는 사막의 샘으로서 폴을 살린 후 자신이 예언의 일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전을 선포하는 폴을 향해 모두가 무릎을 꿇는 가운데 챠니, 제시카, 이룰란 공주만이 자세를 낮추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예언의 체스 말로 이용되고 있음을 자각한 인물들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역설적이게도 체스 플레이어로 활약할 수 있기도 하다. 그 중에서 영화의 마지막 순간 폴을 떠나 홀로 사막벌레를 기다리는 챠니가 이미 실현되기 시작한 예언의 가장 큰 변수일 거라고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