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생각해왔지만 누구에게 함부로 말하기엔 조금 쑥쓰러운 나만의 철학이 있다.
이전 글에서 자주 보이듯 나는 '사랑'과 '용기'만 있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추종자인데, 어디에도 명확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래서 오늘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내가 그 생각을 왜 하게 되었는지, 또 왜 이렇게까지 세상에 내 생각을 알리려고 하는지 기록하려고 한다. 기록을 하는 이유는 이후 나의 생각에 무언가가 더 추가되었을 때 참고하기 위함이며, 또한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전할 때 정리된 형태의 의견을 내세우기 위함이다. 정리되지 않은 채 나의 생각을 말했다가는 제대로 전달도 되지 않을 뿐더러, 내가 믿고 있는 나의 신념이 우스워지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신봉하게 된 계기는 참으로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사랑이신 하느님' 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도 늘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하곤 했는데, 한 신부님의 강연으로 이 문장이 생각보다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느님은 곧 사랑 그 자체이고,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며,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행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널리 전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증표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있을 당시 너무도 신선한 충격을 받아 그 공간 안의 공기까지 모두 멈춰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납득시켜주는 마법의 시간이었다.
내가 왜 선행을 해야 하는지,
왜 누군가를 미워하면 안되는지,
잘못에 대한 대가를 왜 치뤄야만 하는지,
모든 이유를 알게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은 지옥과도 같다.' 라고 배운다. 지옥이라는 것이 어떠한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내가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것을 '비 종교적'인 단어로 환산하면
내가 사랑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불행해지고 힘들어진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아름다운 해답인가.
그냥 막연히 가정과 사회에서 반복적인 학습으로 길러진 도덕적인 이유가 아닌, 진정으로 이 세상을 살기 위해 사랑이 필요한 이유를 들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 날 이후,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버렸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 사랑을 대입하면 거짓말처럼 해결되었다.
1. 내가 지금 울고 있는 이유는 타인 때문인가? Yes.
2. 그 타인과 나 사이에는 사랑이 있는가? No.
1. 내가 지금 행복한 이유는 맛있는 것을 먹어서인가? Yes.
2. 그 맛있는 음식에는 사랑이 있는가? Yes.
1. 저 사람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타인에게 있는가? No.
2. 그 사람은 지금 스스로를 향한 사랑이 있는가? No.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는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 따로 없지만, 당시의 나는 '사랑'을 깨달았다는 것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아 있었다. 모든 시각이 변하고, 지금까지 앓고 있던 온갖 아픔들이 사라졌다.
이제 나는 그저 사랑을 하며 살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순간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 수는 없다. 나는 성인군자도 아니고 예수도 아닐 뿐더러 사람을 죽인 자 까지 사랑하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하지만 적어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누군가를 늘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했고, 그 결과는 언제나 보답으로 돌아왔다. 물질적인 보답이나 어떤 감사의 말이 아니라, 나의 사람으로 남아준 것이다. 나는 사랑을 통해 사람들에게 '진심'까지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대가 없는 사랑을 행했을 때, 언제나 결과가 좋지만은 않았다. 때로 그것은 배신으로 다가오기도,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은 나쁜 마음을 먹기도, 또 누군가를 미워하며 복수를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용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사랑해볼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