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을 떠날 때까지 과연 해를 볼 수 있을까? 온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는데 작년 겨울에도 이랬나 싶을 정도로 매일매일이 흐리고 눈 오는 날들의 연속이야. 기온이 올라간다 싶으면 흐리거나 눈비가 오고 해가 뜬다 싶으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더라고.
아침수업을 가면서 마주한 버려진 트리.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에서 매년 거론되는 문제 중 하나래. 크리스마스가 한국의 설날만큼 큰 명절(?)이라 매년 성대하게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비롯해 가정에서도 트리를 많이 사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면 가장 처치곤란인 게 바로 크리스마스트리(Weihnachtsbaum)라고 하더라고. 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무방비로 버려진 크리스마스트리를 자주 볼 수 있었어.
M2트램을 타고 S+U Alexander pl/Memhard str. 에 내리면 수업 가는 길에 매일 보이는 풍경이야. 신호를 바로 건넌 적이 거의 없는데 그래서 요 신호등 앞에서 자주 사진을 찍었어. 매일 봐도 매일 귀여운 신호등 속 암펠만. 빨간불일 때 초록불일 때 살짝씩 바뀌는 분위기를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해.
옆에 사진은 버스 정류장에서 쉬고 있는 100번 버스야. 운행 전인지 운행 종료인지는 모르겠는데 수업 가는 시간이면 늘 저렇게 pause 표시등을 달고 쉬고 있어. pause 옆엔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이 그려져 있는데 마치 버스가 쉬면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아. 너무 귀엽지 않아?
겨울 되면 좋아하는 풍경 중에 하나인데 바로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을 볼 수 있다는 거야. 시끄러운 세상을 조용히 하라고 눈이 다 덮어버리는 듯하기도 하고 또 하얀 눈이 온갖 더러운 것들을 덮어서 정화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눈 덮인 풍경을 보는 일을 좋아해.
우리 반 선생님은 드레스덴에서 오신 여자분이신데 정말 유쾌하시고 우리한테 관심도 많으셔. 학생이 총 6명밖에 없다 보니 쉬는 시간조차 선생님의 관심을 온몸으로 받을 수 있는데, 창밖의 풍경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 "Romantisches Institut~"(낭만적인 문화원이지~)라며 한 마디 하셨어.
우리 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반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이곳은 대학교가 아니라 독일 문화원(Goethe Institut)이라고 독일에서 독일어와 독일 문화 등 독일과 넓게는 유럽에 관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곳이야. 그래서 배우러 오는 연령층이 정말 다양해. 서울에 있는 독일문화원에서 수업을 들었을 때는 수업 듣는 사람들의 연령층이 많아야 30대 초반까지였거든? 근데 오후반을 수강했을 땐 20대 중반인 내가 거의 막내라인에 속했고 브라질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는 40대 선생님, 건축 디자이너, 70대 할아버지도 계셨어. 오전 반으로 옮기고서는 나와 이탈리아에서 온 남자아이 둘만 학생이었고 나머지 분들은 전부 결혼을 하신 분들이었어. 국적도 가나,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로 다양했어. 재밌었던 점은 독일어를 배우는 이유가 전부 남편분이나 아내분이 독일인이어서. 국제결혼이 한국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풍경이야. 다들 직업도 있고 나보다 나이도 많으셨는데 배우시려는 열정이 정말 대단했어.
배움에는 때가 없다는 말을 이곳에 와서 몸소 느끼는 중이야. 한국은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타임라인이 있잖아. 그래서 대학 또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무언가를 '새롭게'배우는 일을 신기하게 보는 시선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불편했어. 그 시선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하려면 늦지 않았나요?'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풍토를 자아낸다고 보거든. 요즘은 물론 취미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배우는 일에 나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는 일이 예전보다 줄었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50대 이상, 70대 분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일을 특별하게 보는 시선이 있잖아. 그런데 이곳에서 언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많이 반성했어.
무언가를 배우고 또 새로 시작하는 일은 하고 보면 늘 설레! 마음가짐만 충분하다면 때가 없는 것 같아 정말, 진심으로.
이 날은 오페라 <마술피리>를 보기로 한 날이었어. 수업을 마치면 공연시간까지 시간이 좀 떠서 같이 보기로 한 동생이랑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만나기로 했어.
밖에서 사진을 못 찍었는데 이 날의 시간 때우기용 장소는 바로 'Berlin Friedrich str. 에 있는 서점'이라고 말하면 다들 아는 두스만(Dussmann das Kulturkaufhaus)이야. 여기는 서점이라고 하지만 잡화점에 더 가까워.
책뿐만 아니라 바이닐, 앨범, 각종 문구류, 악기, 기념품샵, 영어책을 취급하는 서점(많은 나라의 서점이 자국 언어로 된 서적들을 취급하겠지만 독일 서점의 책들도 대부분 독일어로 되어 있어서)까지 없는 게 없어. 나한테는 아주 천국과도 같은 곳이지.
별난 책들이 많아! 오른쪽은 내가 독일 오기 거의 직전에 흥미를 붙인 릴케 코너. 여기서 시집도 하나 샀어.
우리 아빠가 릴케를 정말 좋아해. 특히 가을날 (Herbsttag)을 정말 좋아하시고. 나는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오르페우스를 위한 소네트'랑 '두이노의 비가'를 접했고, 나중에 찾아보다가 서시(Eingang)를 접했는데 동화, 꿈, 빛, 신화 등 내가 동경하는 것들에서 영감을 받아 쓰는 단어와 문장들이 인상 깊어서 릴케의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는 중이야.
괴테의 색채론에 관한 책, 잠이 안 올 때 읽는 책, 응가를 할 때 ㅎ 도움이 되는 책, 그리고 대망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k-에세이가 해외 시장에서 잘 팔린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막상 여기서 보고 나니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더라. 진짜 놀랐어. 개인적으로 엄청 선호하는 종류의 책은 아니긴 하지만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은 걸 보면 전 세계적으로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건가 세계가 과부하에 걸려있나 싶기도 했어. (대체 왜 잘 팔리는 걸까!)
두스만에서 거의 세 시간 넘게 보낸 것 같아.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정신 팔려서 사진을 많이 못 찍었는데 한 번쯤 꼭 와 볼만 해. 나는 이날 너무 찐하게 구경해서인지 남은 날 동안은 안 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실제로 안 갔어)
서점 구경할 때 다들 어떤 방법으로 구경해? 당연히 관심 있는 책 위주로 손이 먼저 갈 것 같아. 근데 이 나라 서점엔 정말 신기한 주제, 내용, 목적의 책이 많고 그만큼 디자인도 다양해. 예전엔 내용 그 자체에만 눈이 갔는데 요즘엔 아무래도 계속 무언가를 쓰려고 하다 보니 어떤 주제를 어떻게 배치하고 다루고 발전하는지, 첫 문장엔 뭘 쓰는지에도 눈이 가더라고. 그리고 워낙 다양한 내용을 다루는 책이 많다 보니 기자들이 보도가치를 생각하는 것처럼 출판가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나무야 미안해' 스러운 책들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는 없으니 말이야.
요기는 두스만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있는 수제 햄버거 집이야! 베를린에서 교환생활을 했던 친구가 추천해 줬는데, 고구마튀김이 진짜 맛있었어. 같이 오페라 보러 가기로 한 동생이랑 요기서 만나서 밥을 먹기로 했는데 글쎄 동생이 자기 친구를 데려 온대는 거야. 동생도 내 고등학교 후배인데, 데려 온다는 친구도 고등학교 후배였어.
나보고 선배라고 하면서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는데, 남자 후배여서 그런지 처음엔 조금 불편했어. 이후에 밥 먹으면서도 말을 놓니 어쩌니 하는 이슈로 오락가락하다가 지금은 친해졌지. 내 동생이랑 동갑인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우리 동생보다 어른스럽더라. 참나, 우리의 친동생들은 왜 다들 마냥 아기 같은지 몰라.
독일생활을 하면서 친구의 친구(처음 만나는)랑 같이 밥을 먹거나 파티에 가거나 하는 일이 되게 많이 생기는데,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실제로 이렇게 만났던 친구들이 다 너무 좋은 사람들이기도 했고!
베를린에 오페라를 볼 수 있는 극장이 세 군데 있어. 도이체 오퍼 베를린(Deutsch Oper Berlin), 슈타츠 오퍼 베를린(Staatsoper Berlin), 코미셰 오퍼 베를린(Komische Oper Berlin) 이렇게 세 곳인데 이 날 본 오페라 <마술피리>는 도이체 오퍼에서 했어.
독일은 오페라, 콘서트(오케스트라 등) 등이 한국보다 다양하게 많고 잘 만 하면 만 30세까지 할인을 받을 수 있어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좋은 공연을 볼 수 있어. 지난번 독일살이 때도 넬손스 공연을 보러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 갔었는데 너무너무 만족했어서 이번엔 오페라를 봐야겠다 싶었지. 원래 <투란도트>를 보고 싶었는데 일정이 안 맞아서 <마술피리>를 보기로 했어.
사진이 너무 흐릿한데 이 날 바뀐 캐스트 중에 한국 분으로 추정되는 배우분의 이름이 있어서 반가웠어.
오페라는 재미있었어. 그래도 <마술피리>는 모차르트 오페라 중에서도 대중적인 편이라 아는 곡들도 많아서 보기 쉽겠거니 했는데 웬걸. 아무리 영어 자막이 옆에 나와도 독일어로 하는 오페라를 전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1막 때 좀 졸았어.
우리 옆에 있던 관객분이 1막 거의 내내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해서 다른 관객들이 쳐다볼 정도였고 우리 앞자리 관객은 계속 애정행각을 하고 ㅎㅎ 같이 본 동생이랑 공연은 너무 좋았는데 관객 때문에 좀 지쳐서 인터미션 때 나가지 말고 자리에 있자고 했어. 보통 한국 뮤지컬은 15분 20분 정도 인터미션을 둬서 그 정도만 쉬는 줄 알았는데 특이했던 점은 인터미션이 거의 30분이나 되더라고. 이렇게 오래 쉴 줄 알았으면 나가서 구경이라도 좀 할걸.
<마술피리>는 2막이 하이라이트더라고. 사실 밤의 여왕 아리아가 2막에 있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어. 밤의 여왕 아리아를 실제로 들었는데 정말 소름이 쫙쫙 돋더라. 관크때문에 어지러웠던 머리가 한 번에 정화되는 느낌이었어.
공연이 끝나고 나니 10시 40분 거의 11시가 다 돼가더라고. 이쯤 되니까 베를린도 대중교통 배차간격이 넓어지는 시점인지 버스가 20분을 기다려도 안 오는 거야.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것 같아. 안 그래도 집까지 가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집에 돌아오니 거의 새벽 1시가 다 됐더라고.
작은 비하인드가 있는데, 내 휴대폰이 배터리가 18%-20%를 왔다 갔다 해서 같이 밥 먹은 동생 친구에게 보조배터리를 빌렸어. 근데 글쎄 뭐가 잘못됐는지 보조배터리를 연결해 놔도 충전이 제대로 안 되는 거야. 집에는 가야 하고 시간은 늦었고 길은 낯설고 집까지 가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리는데 동생이랑 동생 친구는 그다음 날 여행을 간다고 했단 말이야. 여행 가는데 보조배터리가 당연히 필요하잖아. 원래라면 오페라 보고 가는 길에 동생에게 돌려주려고 했는데 염치불구하고 보조배터리를 가지고 집에 갔어. 집에 가는 동안에도 충전이 제대로 안 되더라. 그래도 보조배터리가 없었으면 분명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이 꺼졌을 테고 그 이후의 일은.. 상상하기 싫어. 이 자리를 빌려 동생 친구 km 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
조금 무서웠지만 버스 기다리는 동안 밤풍경을 사진으로, 영상으로 많이 남겼어.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지 않아서 한적하고 좋더라. 이 날 종일 조금씩 비가 왔는데, 길이 촉촉하게 젖어서 그런지 분위기도 멜랑콜릭 하고 묘했어. 신지훈의 <심해>, 비긴어게인 3에서 부른 <Not going anywhere>가 떠오르는 밤 풍경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