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국가’. 대학 시절 수업을 통해서 원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어떤 수업을 받았는지 사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30~40페이지 읽어서 오라고 한 교수님 숙제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글 자체가 논증과 논박으로 된 글은 태어나서 처음 읽었던지라 낯설었다. 그래서 제대로 읽기를 포기했던 것 같고 이름은 잘 알지만 아픈 손가락처럼 남아있던 책이었다.
그래서 원전 전체를 읽기보다는 이 책을 효율적으로 읽을 방법을 생각했다. 해설서를 보기로 했다. 박성우 교수님의 ‘국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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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읽으며 내게 떠오른 생각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속의 질문보다는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본 적이 최근에 있었나라는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그런 적은 많은데, 그것을 국가처럼 깊게 파고들어 답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이었다. 사실 없다. 생각을 해보려고 했지만, 머리 아픈 문제이기에 덮어두려고 한 적이 많았다.
이 책을 읽은 것을 시작으로 근원적 질문만 던지지 말고 조금 더 답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책과 관련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소크라테스가 국가-개인 유비추론을 통해서 정의를 밝혀내는 부분이다. 정의로운 국가는 지혜-통치자, 용기-수호자, 절제-생산자가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이를 개인으로 비추어 보면 개인 안에 있는 이성, 기개, 욕구라는 덕목이 이성이 기개의 도움을 받아 욕구를 지배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사실 큰 부분으로 증명한 것이 작은 부분에도 통용된다는 것이 책에서도 지적하듯 논리적 빈틈(결함)이 있다. 그럼에도 개인의 정의와 국가의 정의를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대내적/개인적 차원에서 정의뿐만 아니라 대외적/국가적 차원에서 정의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정의로운 국가는 정의로운(영혼이 조화를 이룬) 개인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사회적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개인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개인이 있는 국가가 대외적인 문제(기후 위기, 기아 등)에 대해서 모른 척한다는 것의 정의를 훼손하는 일이 된다. 이 부분은 저자의 해설에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플라톤이 충분히 암시할 수 있는 바라고 생각되고, 현재 우리가 닿지 못한 생각의 방식이어서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