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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유인간 Jul 31. 2020

주부의 워라밸

난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전업주부가 있는 가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이 없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일을 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제외. 친척 중에는 친가에는 막내 숙모, 외가에는 막내 외숙모만이 전업주부였으니 부모님이 장녀, 장남 커플인 우리 집과는 (심리적) 거리가 멀었다. 어쩐지 친구들도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머리가 크고부터는 친구들의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사이 놀러 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적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백수라 쓰고 주부라 읽는 현재의 내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부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요즈음의 내 인간관계는 그야말로 사막 같지만, 그나마 만나는 사람들이 주부인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예를 들면, 사택에서 만난 동네 친구, 문화센터에서 만난 옆자리 언니, 아침마다 요가원에서 만나는 어머님들, 돌쟁이 아이를 키우는 육아휴직 중인 고등학교 친구, 요새 부쩍 자주 만나는 시어머니 등이다.


백수가 되고 처음에는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돌아다닌다고?', '와... 카페마다 주부들 모임으로 꽉 찼네.'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위에 언급한 지인들과 약속을 잡아 브런치를 하거나 카페에 가면 낮시간에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난 그 사이에 이질감 없이 섞여 신나게 자유시간을 즐겼다. 우리 집에 해당이 안 되어서 체감하지 못했던 '아빠는 돈 벌어오는 기계'라는 말은 많은 경우 실제상황이었다. 막 주부가 된 나는 속으로 외쳤다. 전업주부 최고! 만세!


그러나 찬란하기만 할 것 같았던 자유부인 커뮤니티로의 편승은 삐그덕 댔다. 아니, 거의 실패에 가까워지고 있다. 주부들은 내 처음 생각보다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낮 시간에 카페가 북적인다고 해서 그들에게 시간이 많은 것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회사원의 시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시간에 주부들이 카페에 모이는 이유가 있었다. 회사원들은 식사시간이 자유시간이므로 옆 부서 친구를 만나려면 식사시간에 봐야 한다. 반면 주부들과는 점심시간을 비껴 만나야 하고,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면 헤어져야 한다. '식사'는 주부에게 대단한 의무였다. 챙겨야 할 가족이 동갑내기 친구 같은 남편뿐인 나로서는 처음엔 좀 어색했다. 내가 좀 더 놀고 싶으면 노는 것이고 그러다 외식하고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지, 그깟 식사 준비가 뭐가 대수라고 그걸 준비한다고 이 흥을 깨고 들어가아 한담? 주부들은 오히려 회사에 다닐 때의 나보다 자유시간이 없는 느낌이다.


그들에게는 항상 가족이 '업무'인 까닭이다. 내 가족을 챙기고 가정을 돌보는 것, 그것이 곧 '주부'로서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는 업의 정의이다. 그렇다면 식사시간을 안 챙기는 것은 업무태만이다. 아이의 학교와 학원 스케줄을 안 챙기는 것은 앵커가 9시 뉴스를 건너뛰는 것만큼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집에 전업주부가 있다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무지막지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워커홀릭인 과장님을 떠올려보자. 과장님은 매일 야근이고 종종 주말 특근도 불사한다. 삼시세끼를 회사에서 먹는 것 같고, 점심시간이든 커피타임이든 만나면 항상 일 얘기뿐이다. 주말에 놀러 갔다 온 이야기, 요즘 인스타그램 핫플, 여름휴가 계획과 같은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숨 좀 돌리고 싶은데 이 과장님의 머릿속에는 일뿐이다. 나에게 회사일에 대한 불평불만을 토로할 시간에 빨리 업무를 마무리하고 집에 좀 들어가시지...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일과 결혼이라도 한 것 같다. 과장님에겐 워라밸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여기서 회사를 가정으로 치환하면, 주부의 삶이 바로 이 과장님의 삶과 같다. 야근의 수준을 넘어서 출퇴근이 따로 없다. 눈 뜨자마자부터 업무의 시작이다. 중간에 비는 시간이 잠깐 생겨 나를 만나면 대부분 가족 걱정이다. 똑같이 가정이란 주제로 얘기를 나눠도, 회사원에게는 한 숨 돌리는 시간이지만, 주부에게는 일의 연장선이다. 문제는 이 일거리가, 즉 가정이라는 대상이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새 깊이 빠져들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일만 아는 아까의 과장님처럼.


일에 모든 것을 쏟는 회사원들은 많은 경우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하게 된다. 재미가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별것 아닌 일에 쉽게 화를 낸다. 그렇다면 번아웃되기 전에 스스로의 밸런스를 찾는 편이 현명하다. 일에 몰두하는 시간을 줄이고 자신의 상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10년 간 회사를 다니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본인의 워라밸은 본인이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주부도 자신의 워라밸을 스스로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부에겐 번아웃 증후군과 더불어 빈둥지 증후군까지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부의 워라밸을 챙길 수 있을까? 가족 구성원에게는 전업주부의 존재가 너무나도 큰 행운이지만, 과연 본인도 평생이란 긴 시간 동안 그만큼 행복할지 잘 따져봐야 할 것이다. 주부 자신도 가정의 일부이므로.


워커홀릭인 사람들을 보면 '왜 저렇게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까지 완벽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사실 주부들도 일을 잘 못해도 괜찮다. 전업주부가 없는 삶을 30년 넘게 살아온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건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별 일 안 생긴다.


나는 어린 시절 냉장고의 반찬을 데워 점심을 차려 먹고, 감기에 걸리면 혼자 병원에 다녀오고, 혼자 걸어서 학원에 가면서 살아왔지만 괜찮았다. 특별히 불편함도 못 느꼈던 것 같다. 부모님은 결정적으로 필요한 순간에만 도움을 주면 된다.


마치 출퇴근을 하는 것처럼 매일 정기적으로 가정과 나를 분리시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회사에서는 분기별로 워크샵이나 친목 행사를 하는 것처럼 가끔은 집안일과 가족을 뒤로하고 내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도 방법이겠다. 내가 오랫동안 회사원이었기 때문에 회사에 비유해봤을 뿐, 각자에게 맞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요지는, 너무 사랑하는 존재라 간과하기 쉽지만 주부에겐 '가정'이 '업무'란 사실을 종종 상기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는 것이다. 일만 하다가는 워커홀릭 과장님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심한 워커홀릭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을뿐더러 나를 사랑하는 내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세상의 길고 튼튼한 행복을 위해 주부들도 항상 워라밸을 생각하길 바라본다. 더불어 나와 더 놀아주면 좋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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