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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유인간 Dec 10. 2020

엄마 생각 (2/3)

사실 엄마는 내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멋진 삶을 살아왔다.



엄마의 젊은 시절 


내가 아는 엄마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었다. 어릴 적 엄마의 직장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주 갔는데 그곳의 이모들은 내게 엄마를 슈퍼우먼이라고 했다. 내가 본 엄마는 항상 존경의 대상이었다. 학교 선생님도 아닌데 선생님으로 불렸다. 


부모님의 대학시절은 마침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 시기였고, 두 분은 그 한가운데에서 만난 전형적인 서울대-이대 커플이었다. 그 시절의 엄마에게 아빠는 대단히 멋진 모습이었나 보다. 또한 아직까지도 그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나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가정과 자식보다는 본인 중심의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엄마가 나와 동생의 보호자로서의 그 빈자리를 많이 메꾸며 살아온 것 같다. 


엄마는 사회학 전공을 살려 그쪽 분야의 일들을 해왔다.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 정도일 때에는 TV 뉴스 인터뷰에도 몇 번 나올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페미니즘이란 단어조차 생소할 시기에 여성단체에서 일하시다가 그 산하의 생협에서 이사장까지 하셨다. 바른 먹거리를 통해 도시와 농촌의 상생을 꾀하는 그런 곳이다. (덕분에 나는 못 먹는 게 거의 없고 입맛이 오픈된? 편이다.) 내가 13살 때, 아빠가 위암 수술을 받고 시골로 내려가기 전까지 말이다. 



엄마의 집


우리 가족은 아무 연고도 없는 충청남도 깡촌으로 이사했다. 얼마나 깡촌이냐 하면, 버스가 하루에 딱 5대 다니는 곳의 종점이다. 첫차를 타지 못하면 그다음 버스는 10시 이후에나 있어서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비포장도로로 한 시간씩 걸려 중학교에 다녀야 했다.


처음엔 번듯한 집 없이 폐교한 초등학교에 연세를 내고 살다가 나중에는 매입해서 아직도 살고 계시다. 초반엔 10평 남짓한 학교 관사를 조금 수리해 살았는데, 창문이 흔들거리는 나무 창틀이라 바닥은 엄청나게 뜨거운데 공기는 차가웠다. 교실에서도 잠깐 살았는데 여름에는 교실 가득 모기장을 쳤고, 겨울엔 장작난로를 땠다. 화장실, 욕실이 따로 없어서 옛날 학교에서 쓰던 재래식 화장실에 가는 게 고역이었다. 대야에 물을 받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세수를 했고, 겨울엔 뜨거운 물을 끓여서 목욕을 했다. 밤에 자다가 방바닥에 쥐가 돌아다니는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 (그런 어린 시절 때문에 내가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잘 살기도, 집 환경에 집착하기도 하는 것 같다.)


부모님은 관사와 교실 살이를 몇 년 하시다, 황토집을 지어 드디어 집 다운 집에 사시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부터는 기숙사 생활을 했으므로 방학 때 정도를 제외하면 그 집에 그리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그 집도 이제 오래되어 많이 낡았다.


내가 느끼기에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거기서 엄마는 20년이 다 되도록 살고 계신다. 그 집이 참 좋다고 하신다. 거실에서 보이는 마당의 꽃이나 은행나무라던지 집안에 불어오는 바람, 이런 것들 말이다. 봄이나 여름엔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면서 마당 사진을 보내신다. 겨울에 온 마을이 눈으로 덮일 때도 가끔. 


시골 주택에서 사는 게 힘들지 않냐며 우리 집 근처 아파트로 오는 건 어떠냐는 물음에 엄마는 이제 아파트에선 답답해서 못 살겠다고 하셨다.



엄마의 일


서울 사람이던 엄마에게 이런 완전한 시골살이는 어떤 것이었을까. 

나름 엘리트 코스를 걷던 부모님은 정말 안 어울려 보이는 그곳에서 이런저런 시골일을 기웃거리셨다. 


사실 일종의 캐시카우 같은 것을 마련하고 귀농하셨던 것 같은데, 명의도용 비슷한 일을 거쳐 아빠는 빚더미를 떠안게 되었다. (아직도 난 자세히 알지 못한다.) 먹고 살 일이 필요했으므로 염색이나 술빚기 체험마을 같은 것을 이것저것 시도했지만 내가 잘 모르는 이유로 지속되진 않고, 결국은 농사일로 생계를 꾸리신다. 엄마는 시골맛 보따리라는 이름으로 직접 농사지은 신선한 농산물들을 꾸러미로 구성해 일주일에 한 번씩 택배로 보내는 일을 몇 년째 하고 계신다. 


시골 인심이란 것도 옛말이지, 사실상 외지인에 그리 관대한 곳은 아니다. 우리 부모님은 20년 넘게 그곳에서 살고 계시지만 여전히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지금에야 귀농하는 사람들의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어서 텃세라던지 시골살이의 어려움을 미리 접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냥 막연함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그곳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로컬푸드 협동조합을 만들고 꾸려나가고 있다. 이사장이지만 따로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니고 재능기부의 느낌인 것 같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다들 엄마를 좋아하고 존경할 만도 하다.


농사꾼으로 살아가면서 엄마는 가끔 장학재단 심의회라던지, 대학 특강이라던지 하는 일들도 하신다. 언제나 이런저런 일들을 찾아서 하시는데 요즘은 교실에 체험장을 만드는 중이라고 한다. 


시골일이란 게 그렇다. 일은 엄청 많은데 수입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적다. 내가 보기엔 훨씬 에너지가 적게 드는 방법으로 생계를 꾸릴 방법이 많은데, 엄마는 그 일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죽기 직전까지 그 일들을 한다고 하신다. 



이 모든 것들은 내 엄마이기 이전에 박이라는 사람의 다양한 면 중 내가 보는 시선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보는 엄마의 인생은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쪽의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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