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모양

살아내기 급급했던 부모님, 그리고 외동딸

by Seulki Kim

우리 가족은 늘 사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을 하지 않고 살았다.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며, 자신의 삶을 탐구하기보다 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두 사람. 한국 근현대사의 한 켠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온 몸 다 바쳐 일한 청년’, 바로 우리 엄마와 아빠.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 가사 중 발췌)


나의 학창시절 때 우리 가정의 모습은 그리 돈독하진 않았다. 이것을 대표하는 예로 우리는 겸상을 하는 일이 없었다.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그 특수성 때문에 끈끈함이 있었지만, 특히나 아빠와 나의 관계는 그닥 좋지 않았다.


어릴 때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 가 성인이 된 이후 큰 문제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20대 중반 이후 아버지와 크게 여러 번 부딪히게 되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가족에 대한 불만, 때로는 분노가 내 나이만큼 크게 성장해왔던 까닭이었다. 분노라는 녀석은 인지하는 순간 더욱 불타오른다. 그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부모님과 언쟁 뿐만 아니라 거의 몸싸움에 가까운 갈등 상황도 있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나는 외동이기에 가족과 관련된 고민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딱히 공유할 사람이 없었다. 있어도 남보다 못한 가족도 있다지만, 외동으로서 ‘형제자매가 있었다면’ 하는 상상을 자주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절친한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솔직하게 공유한다해도 각자의 복잡스러운 가정사를 모두 이해할 리 만무하다. 결국 문제는 오롯이 내것이며 스스로 답을 내야한다는 것을 끝없이 깨달을 때 마다 참으로 외로워지곤 했다.


싸우지 않으면 다행인 관계. 그게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대표하는 표현이었다. 같이 있으면 무언가 어색한 그런 사이. 우리 엄마는 나와 아빠가 둘이 있으면 불안하다고 했다. 워낙 두 사람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전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던 그 관계가 조금씩 눈 녹듯 괜찮아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30대가 된 이후였다. 아빠가 나름의 노후 대비를 위해 자격증 공부를 하시고, 시험을 보고, 무언가를 해내는 과정을 경험하시기 시작한 그 때. 청년 시절에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우리 아버지가 50대가 넘어 나름의 성장을 거듭하시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아버지가 공부를 시작하시고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고. 1~2년 즈음에는 ’내가 철이 너무 늦게 든 것 같다‘ 는 이야기도 하셨다. 아버지를 떠나 한 사람의 성장을 보는 듯 해 괜시리 뿌듯한 기분도 있었지만, 한 켠으로 내 마음이 차가워졌던 이유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뭐가 부끄러운가? 자신의 아버지가 열심히 공부하셔서 자격증을 취득하시고, 나름대로의 미래를 준비하시고,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알고 그것을 표현하시는데. 무엇이 부끄럽단 말인가?


바로 ‘이제서야 그것을 알게 되셨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더 어릴 때 이러한 것들을 아셨다면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편하게 아빠를 대할 수 있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 이미 지나버린 세월에 대해 이런저런 수를 두면서 마음이 현재에 있지 못하는 내 모습.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부끄러움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당신이 젊을 때, 그러니까 내가 한창 성장할 즈음에, 본인의 취미 활동에 푹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고 하나뿐인 딸과 추억을 쌓지 못한것에 대해 후회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그 날. 그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아버지는 이제야 그것을 깨닫고, 미안해하신다.


사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딸 하나는 잘 키우고 싶어 부단히 노력하신 엄마. 이제 엄마의 얼굴과 몸에서는 절대 못본 체 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딸이 30대 중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부족했던 점을 직면하고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시작한 우리 아버지.


이것이 우리 가족의 모양이다. 그간 내가 이 모양을 받아들이기 싫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우리 가족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양새의 다른 가족들을 보며 어찌나 부러움을 느끼고, 부러워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껴왔는지 모른다. 가족에 대한 양가감정에 시달리고, 부모님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기를 무척이나 바라며, 그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보기보다는 내 기대치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불행해지길 자처했다.


그 악순환 속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때로는 상처받고 울었는지 셀 수 없다. 동시에 내가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가족을 무척이나 할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도 다 필요한 과정이었는지, 비로소 우리 어머니가 나름의 여유를 찾으시고, 아버지가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 마음 역시 차분해져감을 느낀다.


아마도 우리 가족은 아직도 나름의 모양을 갖춰가는 중인지 모른다. 누군가는 둥근데 누군가는 무척이나 모나서, 둘을 붙여놓으면 어쩔 수 없이 틈이 생기는 것을 피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돈, 시간, 나름의 노력으로 그 틈을 메꿔도 결국 원래의 모양 때문에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 그냥 그대로 우리의 모양인 것이다.


이제는 이 모든 모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내가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려한다. 더욱 행복해지기 위해. 쉽지 않은 세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더욱 이롭게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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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우리 나름의 모양대로 재밌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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