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일을 많이 한다.
그때 그 사건이 아니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한참 왕성하게 사회와 치열하게 일하며 살 때가 있었다. 처음으로 기획사를 차리고 파리만 날리던 시절, 메일 한 통을 받고 기획사를 접고 우리나라에서 좀 크다는 교육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에게 주어진 목표는 새로운 브랜드 출시에 따른 교재와 프로그램을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1년여 가까이 난 거의 매일 10시에 퇴근한 거 같다. 밤에 차가 끊겨 택시를 타고 가던지, 회사 앞의 모텔에서 잠을 자고 일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얼굴이 너무 하얗게 변했나 보다. 거의 프로젝트 개발이 마무리될 때 고등학교 동창이 나보고 병원을 가라고 권유를 했고, 회사 동료들도 나를 걱정해서 병원에 가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난 그 당시 일이 먼저였다. 결국 인쇄까지 다 마치고 가장 높으신 분께 모든 보고를 마친 후 난 회사 앞 동네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갑자기 병원에서 난리가 났다. 응급실에 당장 입원해야 한다고 난리였지만 난 사무실서 내 할 일이 남았다. 결국 의사의 만류에도 일 다 하고 내 차를 끌고 집 앞에 있는 큰 병원에 두 시간이 넘는 운전 끝에 갔다. 처음에는 응급실로 안 들어가고 진료를 받으러 접수를 하려 하니 모든 진료가 끝나 그냥 응급실로 들어가서 의사 소견서를 건네주었다. 난리가 났다. 그 생난리가...
기억에는 간호사분들 6명 정도가 날 에워싸고 나에게 주사를 막 찌르고 급하게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보호자 전화번호 대라고 소리 지르고...... 눈이 감겼다.
정신을 차렸다. 아빠와 누나가 옆에 있고 의사 선생님께서 막 나를 혼냈다.
내장파열로 인해 피를 많이 흘렸단다. 스트레스와 과로에 의한 내장파열인가?
병원에 누워있는데 주변 사람들 모두 중증 환자였다.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난 천장을 바라보다 후배에게 전화했다.
"나 여자 친구 좀 소개해 줘!"
현재 짝지는 그때 만난 아름다운 여성이다.
난 그 후 일을 많이 하지 않으려 했다..
근무시간만 하려 했다.
그러면서 취미로 다시 낚시하러 다니기 시작했고 전국 곳곳에 있는 성지순례(난 가톨릭 신자다)와 전국의 아름답고 오래된 성당 등 쉴 때마다 짝지와 다니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갔다.
몇 해가 흐르고 결혼도 하고 지금 박물관에 와있다.
처음 만나본 박물관은 나에게 새로운 재미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 박물관 초보가 아니라 모두가 일부 학예사 빼고 초보다.
신생 박물관....
열심히 일하는 게 다가 아닌 경험이 있어야 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느새 1년이 훌쩍 넘어갔다.
그래도 어느 날부터 근무시간에 일하고 퇴근하는 성향으로 바뀌어서 정시에 퇴근하려고 노력을 했다.
처음 8개월 정도는 정말 정신없이 모르는 일을 어떻게 지혜롭게 일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다른 생각 없이 일에만 몰두했다. 동료들과의 피곤함, 모르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 그리고 잦은 휴관은 사람을 힘들게 했다. 작은 회사 조직이면서 신생 회사인 우리는 아직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보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정말 열심히 일한다. 자기 파트도 아닌데 오히려 본 파트인 사람보다 그 일에 대해 열심히 하고, 오히려 저 부서에서 이 부서 일을 보고한다. 왜 그럴까? 워커홀릭은 아닌데 무언가 좀 이상한데 왜? 저쪽 일을 여기서 하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모두가 다 늦게까지 일을 한다. 나만 정시에 일찍 간다.
난 꿋꿋하게 남들이 야근할 때 일찍 간다.
내 파트 일을 정확히 하고 더 잘하기 위해 내 방법대로 쉼도 가지고 자료도 찾고.... 암튼 난 일찍 간다.
그래도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평일에 하는 취미생활을 한다. 지금은 취미이지만 제2의 인생을 펼치고 싶은 꿈인 그림책 만들기이다.
그림책 작가가 어릴 적부터 되고 싶었다.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스토리가 생각나면 계속 적고 그 스토리를 완성하기 위해 사진도 찍으러 다니고, 여하튼 난 열심히 그린다. 그리고 어느 날 산타를 만났다. 그래서 그림책 작가로 데뷔를 했다. 그림책 안의 작가 약력에 박물관에서 일하는 것을 넣어야 할지 말지를 엄청 고민했던 거 같다. 그리고 결국은 넣었다. 그리고 출간 후 박물관 동료들에게 자랑도 하고 사인도 해주고 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분들은 작품이나 유물을 많이 보면서 감각을 계속 키우는 거 같다. 학예사 한 분이 최신 태블릿 PC를 구매하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쓴다. 원래 글을 잘 쓰는 분인데 그림에 아직 서툼은 있지만 감성 그림을 그린다. 신기했다. 그리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 많아지니 즐겁기도 하고 그 감성을 보고 내가 좋아하고 있다.
아마도 스트레스를 나랑 같은 이유로 취미를 가지며 푸는 것일까? 어찌 되었건 박물관 일을 하면서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또 다른 기획에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여유가 있어야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기획뿐만 아니라 박물관에 맞는 정확한 일을 하지 않을까?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일에만 치여 살면 창의적인 일보다는 당장 눈앞에 일을 처리하느라 그 뒤를 못 보는 거 같다.
박물관은 지금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곧 재개관이 될 것이고 온라인 전시를 오픈할 것이다.
또 한 뮤지엄 샵도 다시 활기를 찾아 일은 고돼도 서로서로 격려할 것이다. 휴관이라는 단어는 박물관에서 재충전도 되지만 긴 휴관은 오히려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온다.
밀렸던 일 중 하나가 지난 전시에 대해 아카이빙을 하는 것이다. 지난 전시의 사진 자료로 도록을 만든다거나 홈페이지에 지난 전시에 대한 리뷰 및 다양한 관점을 남긴다든가 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미래 어느 날 2020년 오늘을 기억하는 아카이빙을 하려 한다. 작가로서 박물관에서 전시했다. 그리고 작가는 나이가 들어 손주를 본다. 손주에게 내가 2020년 어느 날 이곳 박물관 안의 전시장에서 이런 전시를 했단다. 하면서 그날의 생생한 영상이 아닌 현장을 보여준다.
이게 나에게 오는 이제 해야 할 아카이빙이다.
곧 업체를 만나야 할 것이고 실측을 통해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와 어떤 플랫폼을 만들어서 전시가 자유롭게 장착이 되게 할지를 고민해야 할 단계에 왔다.
박물관 안에는 대나무밭이 있다.
힘들어하는 동료가 대나무밭에만 들어갔다 오면 웃고 나온다. 난 그 밭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나무밭의 주인은 우리나라에서 미디어 아트에 유명한 감독님이 계신 방이다. 아마도 그 대나무밭에는 바람이 많이 부나 보다.
난 그 밭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그 밭에 들어온 사람들이 웃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