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1 (xx) 이 일지를 쓰게 된 이유

왜 이 재미없는 일지를 쓰는가

by 윤진이

"오늘은 임산부석에 앉았다or못앉았다"

이 정도가 컨텐츠의 전부인 '재미없는 일지'를 남겨보자고 결심한 것은 사실 특별한 계기가 있다.


그날은 임신 극초기, 약 다섯개의 임신테스트기(....)를 통해 철저한 검증을 거쳐 임신임을 확신한 후에 초음파 확인을 하러 산부인과에 가는 길이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7호선이었지만, 빈자리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출입문 근처에 서 있었다. 보통의 지하철탑승객이 그렇듯 고개숙이고 내 핸드폰만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봤는데, 임산부석 앞에 배가 꽤 많이 나온 임산부가 서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임산부석으로 눈길이 갔다. 임산부석에는 중년의 여성이 옆자리에 앉은 자신의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보아하니 임신중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앉은키 기준으로 상당한 가시권 안에서 임산부뱃지가 달랑거리고 있었는데... 계속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못본척하기도 힘든 각도에서(진짜 장담하는데 분면히 봤다 못볼수가 없다) 임산부뱃지를 외면하고 옆자리 친구와 수다를 떠는 아줌마,

체념한 듯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는 만삭의 임산부,

그녀의 가방에 매달려 힘없이 흔들리는 임산부 뱃지,

그리고 그 상황을 모두 바라보고 있는, 산부인과에 임신을 확인하러 가는 나.....


'이게 내 미래구나.'


갑자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지금 나서서 이분이 앉으시게끔 하려다가 싸움같은게 나면 어떡하지, 나는 곧 내리는데. 괜히 싸움만 걸고 내가 무책임하게 내려버리게 되면 임산부가 더 곤란해지는 것 아닐까? 갈등하면서 두개정도 정류장을 보내고 나니 내가 내릴 역이 다가왔다.


나는 결국 그냥 내렸다.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하고 가슴아파서 아직도 마음이 쓰린다. 그분이 앉으시도록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통탄과, 결국 그 모습이 내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같은 것이 섞여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임산부 뱃지를 받자마자 매일 기록을 남기기로 다짐했다.

임산부로서, 임산부석에 앉고자 할때 어떤 환경이 만들어져 있는지 1인칭 시점에서 남겨보기로 했다. 그리고 1인 표본이긴 하지만, 임신기간동안 얼마나 임산부석에 앉을 수 있게 될지 그 빈도를 통계로 남겨보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의 기록은 이렇다.

- 출근길: X. 임산부가 앉아있음

- 퇴근길: X 상자를 안은 청년1명, 우리엄마 또래 아줌마1명이 각각 앉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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