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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약사언니 Aug 29. 2020

소중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귀국을 결심하다

여러분은 하루하루 주어진 인생에 휩쓸려가듯 사느라 소중한 사람을 돌보지 못했고, 결국에는 그 사람을 잃었기에 후회할 수밖에 없던 경험이 있는가?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느라 상대방의 호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지나고 나면 불연듯 상대방의 배려가 소중했음이 깨우쳐 지는 순간들이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줄 차례가 온 것이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미국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생소한 미국인들의 행동은 나에게 상처가 되곤 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의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도와준 호스트 가족이 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함께 지냈던 미국인 가족이다.




 고등학교 2년 당시, 함께 지내던 호스트가 개인 사정으로 이혼을 하게 되었고, 나는 새롭게 머물 호스트 가족을 찾아야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함께 지낼 호스트 가족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졸업 시까지 함께 머물려고 했던 가족의 형태에 변화가 생기면서, 나의 삶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대학입시에 집중해야 할 시기, 내 마음은 급박해졌다. 이 시기만큼은 내 인생에 어떤 변화도 받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안정적인 시간들을 보내고 싶었다.


 다급한 마음으로 학교 카운슬러와 유학원에 내 사정을 알렸다. 보통 호스트 가족은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매칭이 됨으로 갑자기 거주할 수 있는 가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학교 카운슬러는 당시 학교 직원으로 근무하시던 한 직원 분을 알려주며, 나보고 직접 그분께 집에 함께 머물 수 없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그 학교 직원 분에게 가서 내 사정을 설명했다. 그분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미 2명이나 되는 학생을 호스팅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의 급박한 사정을 들으시더니 그분은 집에 가서 남편과 상의해 보시겠다고 하고는 며칠간 답이 없으셨다.


 그렇게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며 며칠이 흘렀다. 어느 날, 그 직원 분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드디어 나를 호스트 가족으로 받아주시겠다고 했다. 그 직원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호스트 엄마 린다였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만나게 된, 호스트 엄마 린다 그리고 호스트 아빠 조, 그분들을 만난 것은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린다와 조는 피 한 방울 여있지 않은 나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그분들이 보여주신 사랑은 경이롭고, 존경스러웠다. 그분들은 나를 정말 딸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호스팅 하면서도 그 사랑에 편중됨이 없었다. 그분들은 매주 나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내가 사랑받기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크리스마스에는 함께 미국 본토 인디언 마을에 mission trip을 가서 타인에게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한 기쁨도 가르쳐 주셨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때 트리 앞에 선물을 쌓아놓고 선물을 풀어보는 전통이 있다. 크리스마스 날, 트리 앞에는 선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호스팅 하는 자녀들을 위해 자신들의 자비로 선물을 구비하신 것이다. 그중 기억나는 선물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이팟이다. 조는 아이팟을 선물 준 것은 물론 이거니와 아이팟에 성경을 넣어 선물 주었다. 조 덕분에 등굣길 스쿨버스 안에서 성경 듣는 것을 위안 삼으며, 힘들었던 고3 시절을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나갈 무렵. 지원했던 대학교에서 합격통지서들이 날아왔고, 어떤 학교에 재학할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고도 어떤 대학교에 등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를 보던 조와 린다는 College trip을 제안하였다. College trip이란 대학교 입학을 눈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이 아빠 엄마와 함께 지원한 여러 대학들을 여행 다니면서 어떤 대학에 등록할지 정하는 문화이다. 나는 나의 친부모도 아닌 조와 린다에게 college trip을 부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와 린다가 나에게 먼저 college trip을 제안한 것이다.


 합격 통지서가 날아온 여러 약학 대학교들을 놓고 고민하다가 학교 카운슬러가 강력 추천해준 학교로 college trip을 가기로 했다. 당시 내가 살던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college trip을 간 학교는 차로 8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왕복으로 최소 16시간. 쉬는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꼬박 하루는 도로에서 지내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조와 린다는 자신들의 일도 마다하며 내가 입학할 대학교 선정을 도와주기 위해 휴가를 쓰고 college trip에 동참해 주었다. 미국 대학교들은 college trip을 가면 대학교를 둘러보면서 소개를 해 주는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투어 프로그램을 참여하던 중에도 조와 린다는 대학교 측에 여러 가지 질문을 적극적으로 해주었고, 덕분에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조와 린다의 도움으로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그들의 품을 떠나 대학에 입학하여 숨 가쁜 시간들을 달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에 방문할 일이 있어 조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조가 말하길, 린다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암이라고?


당장 병원으로 뛰어갔다. 린다는 울먹이는 나를 보면서 괜찮아질 거라고 별거 아니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정말 별거 아니니까 곧 괜찮아질 거라는 린다를 보며 정말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후로 일 년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을까. 본과 2학년 때쯤, 조에게서 린다의 장례식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런데 장례식이라니.


허망하고 헛헛한 마음에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지 조차 혼란스러웠다.


 화도 났다. 더 자주 연락하며 지내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린다의 건강상태에 더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린다의 말을 곧이 곶대로 믿었던 나를 원망했다. 약대 6학년 때 (본과 4학년)는 일 년 내내 인턴십을 하게 되는데, 인턴십은 뉴욕에서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때만큼은 조와 린다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밀린 시간들을 함께 보낼 것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례식이라니.

 조와 린다는 내 친부모님 또래로 당시 나이가 아주 많은 편도 아니었다. 이렇게 빨리 나의 곁을 떠날지 몰랐다. 린다는 내가 생각해 놓았던 타임라인까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덜 바빠지면 더 많이 방문하고 연락하려고 했는데, 그런 나의 마음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그렇게 나를 떠났다.


 지금도 종종 린다 생각을 한다. 린다가 살아 있다면,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정착했을 거라고 확신할 만큼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큰 의미였다. 타지에 가족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은 미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큰 역할을 하곤 한다. 린다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고, 미국이 생각날 때마다 지금도 그녀가 많이 그립다.  




 길었던 유학생활 중에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주었던 사람들이 나의 곁을 떠났다.


 유일하게 유학을 지지해 주셨던 외할머니는 한평생 지병 치레를 하게 되셨고, 외할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왕복만 이틀이 걸리는 한국과 미국의 거리상,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은 참여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친구가 할아버지랑 영화를 보러 갔었다고 말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던 할아버지였는데 나는 왜 살아생전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던 무거운 세월 속에서도, 나의 상황에 원망이 들었던 순간들 속에도 나의 시간은 속절없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슬픔을 뒤로한 채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나의 발걸음을 계속하며, 내가 받은 큰 사랑을 돌려줄 수 없음에 탄식하던 마음의 여운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리고는 도대체 내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 긴 세월 가족과 소중함을 등지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 계기들이 나를 한국으로 귀국시킨 가장 큰 이유들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리 돈과 명예, 일확천금을 얻은들 그 가치들은 이미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들을 살려낼 수는 없기에.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내게 남아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고 싶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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