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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약사언니 Sep 08. 2020

좁은 시야, 어렸던 나의 꼰대 마인드

초등학생 시절부터 가장 먼저 등교하여 교실 자물쇠를 여는 부지런한 아이, 선생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칠판에 떠드는 아이 이름을 적어놓다가도 친구가 혼나는 게 싫어 선생님 오시는 소리에 떠드는 아이 이름을 지워놓던 반장 아이, 소풍날에도 학원 한 번 빠지지 않았던 만년 개근 아이, 중학생 때까지도 횡단보도를 손들고 건넜던 바른생활 아이. 어떤 것이 나를 착한 어린이 증후군에 빠지게 했을까? 그리고 착한 어린이 증후군에 빠져있던 그 아이는 왜 정체되어 갔던 걸까? 




 고등학교를 한국에서 재학하다가 미국으로 유학 간 유학 초반에 나의 마인드는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다. 


 한국에서 여자 중학교 (여중)을 다니던 시절, 이 여중은 여자 고등학교(여고)가 함께 운동장을 공유하는 구조의 학교였다. 내 중학교 옆 여고에서는 아침과 점심시간마다 한 학년 위인 동아리 선배가 바로 아래 학년 후배에게 90도로 인사 훈련을 시키는 진풍경이 이어지곤 했다. 물론 아무도 이것을 문제 삼는 이도 없었다. 


 그 넓은 운동장에서 여고 동아리들이 경쟁하듯 후배들에게 인사 훈련을 시키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도 그렇고, 이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후배들이 선배에게 예절 훈육을 받는구나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때문에, 나도 무의식적으로 저런 문화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저렇게 한 학년 선배에게도 90도로 인사하며 깍듯이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까지 생각했던 것도 같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내가 미국이라는 사회를 만났다. 


 미국에서 대학생 시절, 한인 모임에서 리더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생활의 첫 시작이었다. 한인들의 모임에는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고등학생 때 유학 온 사람, 이민 1.5세, 이민 2세 등등.  심지어 사람들마다 어릴 적부터 유학했던 나라들도 각양각색이었다. 중국, 일본, 캐나다, 멕시코, 유럽 등 각기 다른 나라에서 중/고등교육을 받다가 대학교를 미국으로 유학 온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이 어린 사회 초년생 시절,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지 모른다. 


 한 살 위가 가장 어렵다고 했던가? 수직적인 문화를 보고 자란 나에게 대학생 한인 모임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또래 친구들이 다양한 문화에서 성장한 만큼 서로가 생각하는 방식이 많이 달랐다. 그랬기에 리더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그 친구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나에게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예절의 문화가 다른 이들에게는 불필요한 겉치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오해가 생겼던 부분은, 한국에서는 정서상 선배가 청소를 하고 있으면 후배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도와줄 법도 한데, 미국에 있는 또래 친구들은 마냥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선배나 리더가 더 궂은일을 하는 것이 당연시 취급되는 분위기였다. 내가 장유유서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었고,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는 것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선배 혹은 리더라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회와 만난 것이 문득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리더십의 역할이 더 중요시 강조되는 사회와 만난 것이다. 그동안 습득했던 도덕책 속 삼강오륜 같은 도덕의 지침이나 사회의 규범이라고 자부했던 근간의 잣대는 글로벌 시대에 부합하기 어려운 정의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나의 기준을 들이밀며 또래 친구들에게 나의 잣대를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또 다른 사회의 풍조를 체감하며 묵묵히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 년쯤 지났을까.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모임에 보탬이 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친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예의로 지켰고, 선을 베푸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도태되어 있었던 것은 나의 사고방식이었던 것이다. 




 서로가 어렸고, 경험치가 부족하여 오해가 있을 때도 있었지만, 이 모임에서 필요했던 것은 서로의 다름을 지켜봐 주고 기다리던 묵묵하고, 따뜻한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이 같은 경험들을 하면서 나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을 정죄하던 나의 마음을 반성해 보았다. 내가 바르게 살아온 만큼 나 자신이 옳다고 자부했지만, 나는 내 경험치 안의 좁은 사회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사람들의 시야는 좁다. 어떤 사회에서 살아왔던 마찬가지다.
아무리 온갖 지식을 마스터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딱 자신이 경험한 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그게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 속에서 살아온 또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형화되어있던 나의 사고는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착한 어린이로 바르게 살아왔다고 해서 무조건 내 말이 옳은 것이 아니었다. 나와 사고방식이 다른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친구들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만의 방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의 진정이 통할 때,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졌고, 서로가 성장하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친구들을 마음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해 보기도 했고, 나와 결이 다르며 이상한 사람 취급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단지 미약한 지식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인간일 뿐 넓은 세상의 지혜를 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다행히 시간은 마법과도 같이 나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과 경험치를 주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가 옳은 만큼, 그들도 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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