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우린 2000mg으로도 안 되는 것
서울 지하철 9호선 급행열차는 기점인 김포공항역이나 종점인 종합운동장역에서 타지 않는 한, 어느 역에서 어느 시간대에 타더라도 늘 붐빈다. 아니, 붐빈다는 말로도 모자라다. 특히나 출퇴근 시간대에 타게 되면, 일체의 감각과 사유 활동을 중지시킨 채, 내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따위는 잊고 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각설하고. 하루는 당산역에서 운이 좋게도, 내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 내린 덕분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다음 역은 여의도. 시간대는 퇴근 무렵. 요일은 금요일. 이윽고 지옥의 문이 열리자 승객들은 밀리고 밀리고 밀려왔다.
내 앞으로 두 명의 젊은 남자가 밀려와서 겨우 손잡이를 잡고 몸을 고정시켰다. 말끔하게 슈트를 입은 두 사람은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으려나 싶을 만큼 퍽 앳된 얼굴이었는데,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신입사원이 된 지도 얼마 안 된 듯싶었다. (읽는 분들, 오해는 마시라. 그들을 훔쳐본 건 아니다. 그냥 대놓고 본 거다. 그리고 내 앞으로 와서 선 그 순간에만 본 거다. 대화야 바로 코 앞에서 들리는 것이니 별도리 없고)
회사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한 남자가 연신 피곤하다며 하품을 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자기도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던 중, 피곤을 호소하던 남자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나, 여자친구랑 헤어지게 될 것 같아."
"지난번에 이미 헤어진 거 아니었어?"
"아닌데?"
"지난번에 헤어졌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 2주 동안 서로 안 봤을 때 그때 얘기하는 건가 보구나. 이번엔 진짜 헤어지려는 거야."
"꽤 오래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몇 년 됐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랬지."
"왜 헤어지는데?"
"피곤해서. 너무 피곤해서 못 만나겠어."
"이해해."
일이 피곤한 걸까, 여자친구가 피곤한 걸까, 둘 다 일까. 그렇지만 사실, 피곤하다는 대답 보다, 이해한다는 그 말이 더 슬프게 들렸다.